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79번 요한복음 15장
(인도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회중)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인도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회중)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인도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회중)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인도자)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회중)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인도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회중)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다같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5-11)
송영 _ 찬송가 1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50장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말씀 _ 마태복음 14장 13~21절 너희가, 주어라
너희가 주라 (마태복음 14:13~21)
일주일이 굉장히 빨리 지나갑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람을 만나는 이 예배를 통해 ‘영접하는 자’ 하나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감정보다 더 기쁜 것,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기도하면서 ‘우리가 8명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 8명이 영혼으로 어떻게 서로 교감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텔레파시를 아십니까?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승현이와 온유는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겠습니까? 멀리 떨어져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며 어떻게 영혼으로 하나가 되는지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몸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감각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히어로 영화를 보면 ‘내 안에 다른 영혼이 있다’라는 설정이 자주 등장합니다. 어떤 애니메이션에서는 한 사람 안에 여덟 명의 다른 영혼이 존재하며 서로 대화하고 교감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것을 보며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예배를 통해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혼으로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그 감각을 일깨워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영적인 하나 됨을 시도할 때, 어느 날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사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지만, 신기하게도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일대기 안에서 이 사건이 놓인 위치가 조금 다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며 성령을 부으신 뒤 파송하시는 장면 뒤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흩어져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신 후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 언덕으로 떠나셨는데, 수많은 무리가 쫓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말합니다. "예수님, 이제 설교와 가르침을 그만두시고 이 무리를 흩어 보내어 마을에 가서 밥을 사 먹게 하든지, 내일 다시 오라고 해야겠습니다."
이 장면이 바로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일어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이 오병이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고 12바구니가 남았다는 모티브가 워낙 유명해서 다양한 소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 기적의 전후 순서가 조금 다르게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14장 13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걸어가신지라"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배경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들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들으시고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물러가셨을까요? 사람들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신 예수님을 쫓아 배를 탈 수는 없었기에, 호수 둘레를 걸어서 돌아서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찾아왔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떠나신 이유를 "들으시고"라고 시작하는데, 그 들으신 내용이 바로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의 죽음과 오병이어 사건을 직접적으로 연결하여 기록한 것은 오직 마태복음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복음서 간의 순서 차이를 두고 "성경이 조작되었거나 연대기가 맞지 않는 것 아니냐"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수능을 11월에 보았는데 어떤 기록에는 6월에 보았다고 적혀 있다면,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당시의 역사적 기록은 후대에 작성될 때 똑같이 베껴 적지 않고 저자마다의 관점과 강조점에 따라 구성했음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똑같이 베꼈다면 신뢰도가 더 떨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복음서 저자마다 가진 고유한 관점과 스토리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왜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을까요? 이 오병이어의 배경은 신약에만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열왕기하 말씀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 42절부터 44절 말씀을 함께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 앞에 두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이 말씀을 들으니 익숙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행하신 단독 사건이 아니라, 이미 구약 시대에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일어났던 기적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 엘리사의 기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였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먹고 남았습니다.
이 두 사건의 연결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931년,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됩니다. 북쪽의 ‘북이스라엘’은 10개 지파로 구성되었고 수도는 사마리아였습니다. 남쪽의 ‘남유다’는 2개 지파로 구성되었으며 수도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북이스라엘은 이라크·이란과 가까운 쪽이고, 남유다는 지중해 및 가자 지구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과 가까웠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분열 이후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초대 왕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으로 예배드리러 가는 백성들을 막기 위해 벧엘과 단에 신전을 만들었고, 이때부터 정통 신앙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아합’ 왕이 등장하는데, 그는 시돈의 공주인 ‘이세벨’과 결혼합니다. 이세벨은 바알 숭배자였고, 이 결합으로 인해 하나님을 섬기던 이스라엘 국가 전체가 바알을 숭배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우리가 바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임을 선포하며 바알과의 영적 전쟁을 시작합니다.
‘엘리야’를 히브리어 원어로 쓰면 אֵלִיָּהוּ(’Ēlīyyāhū) 또는 אֵלִיָּה(’Ēlīyyāh)입니다. 이 이름의 어원을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 אֵל(’Ēl, 엘): 하나님
- ִ(i, 이): 나의 (소유격 어미)
- יָהּ(Yāh, 야) / יָהוּ(Yāhū, 야후): 여호와(YHWH)의 약칭
즉, 엘리야의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바알이 아니다! 내가 섬기는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다!"라고 선포하는 이름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믿고 계십니까? 돈입니까, 사람입니까, 다른 종교입니까? 명확하게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을 선포했던 인물이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비를 멈추게 하고,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승리했으며,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은 뒤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끝까지 추종하며 "저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깨달은 제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를 히브리어 원어로 쓰면 אֱלִישָׁע(’Ĕlīšā‘)입니다. 이 이름의 어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 אֵל(’Ēl, 엘): 하나님
- י(i, 이): 나의
- שָׁע(Yāša‘, 야샤): 구원하다, 구원
따라서 엘리사의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엘리야가 심판을 외쳤다면, 엘리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그 엘리사가 보리떡 20개로 백성을 먹였던 모형이, 오늘 마태복음 오병이어 사건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당시 아합 왕과 이세벨의 구도는 예수님 시대의 헤롯 왕과 헤로디아의 구도와 정확히 겹칩니다.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았을 때 세례 요한이 이를 비판하다 감옥에 갇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통해 이세벨과 헤로디아, 아합과 헤롯을 대조시키며 구약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저자적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명확히 알 필요가 있어 부연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은 한글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신을 뜻하는 일반 명사는 ‘엘(El)’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제 고유한 이름은 히브리어 자음 네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를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네 글자)'이라고 부릅니다.
- YHWH (יהוה): 요드(Yod), 해(He), 바브(Vav/Waw), 해(He)
출애굽기 3장 14절~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처음 밝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즉 창조주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부모를 통해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15절에 나오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자음이 바로 ‘YHWH’입니다.
십계명에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감히 'YHWH'라는 이름을 입으로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문자가 나오면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님)'라고 바꾸어 읽었습니다. 후대 학자들이 자음 'YHWH'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합성하여 읽기 시작하면서 라틴어와 영어를 거쳐 오늘날 한국어의 '여호와(Jehovah)'라는 발음이 정착된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어의 원음에 가까운 발음은 '야훼(Yahweh)'로 추정됩니다.
이 이름들이 예수님과 어떻게 연결될까요?
'예수'라는 이름은 신약 성경 언어인 헬라어로 Ἰησοῦς(Iēsoûs, 이에수스)라고 적히지만, 그 구약의 히브리어 원형은 יֵשׁוּעַ(Yēšūă‘, 예슈아) 또는 יְהוֹשֻׁעַ(Yəhōšūă‘, 여호수아)입니다.
- יָהּ(Yāh, 야/여호와) + יָשַׁע(Yāša‘, 야샤/구원하다)
즉, 예수의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엘리사의 이름 뜻("하나님은 구원이시다")과 원어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구원의 의미를 가집니다.
정리하자면, 여러분은 이 세 인물의 원어적 의미와 연관성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 엘리야 [אֵלִיָּהוּ]: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인지 선포)
- 엘리사 [אֱלִישָׁע]: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구약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모형)
- 예수 [יֵשׁוּעַ / Ἰησοῦς]: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의 완성)
엘리사를 통해 일어났던 구약의 기적이, 이제 구약을 넘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을 향한 새로운 구원의 사건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처럼 옛것과 새것이 함께 연결되어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이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오병이어 본문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 마가복음 6장 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마태복음 14장 1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느니라"
똑같은 사건이지만 마가복음은 '가르치셨다'고 기록한 반면, 마태복음은 '고쳐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백성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곳은 빈들이고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배고픔이나 결핍처럼 반드시 채워져야 하는 ‘필요’가 생깁니다. 제자들도 무리의 필요(빵)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이 사람들을 보내어 각자 해결하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6절)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보내자고 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가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 "너희가 주라"가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단순히 "5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란 누구인가?’를 명확히 가르쳐 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주라"고 말씀하시자, 비로소 무엇이 등장합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등장합니다. 사실 그것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무리가 가서 사 먹게 하자"고 생각했을 때, 자신들이 가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이것으로는 이 많은 무리를 먹일 수 없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예수님 한 분만 겨우 드실 분량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남들이 가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남이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해야 한다"고 관점을 바꿔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왔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축사(기도)하신 후 다시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러한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고, "이것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양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우리가 가진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비록 내 눈에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예수님께 가지고 나와 말씀에 순종하여 나누기 시작할 때,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를 거쳐 엘리사를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구원의 의미를 깊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가 가진 것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나누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주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