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81번 에베소서 4장
(인도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회중)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인도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회중)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인도자)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회중)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인도자)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회중)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다같이)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1-6)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50장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말씀 _ 마태복음 18장 21~35절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형제를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참된 제자의 길과 하나님의 통치
본문 말씀: 마태복음 18장 21절–35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우리는 지난주 마태복음 18장 15절부터 20절 말씀을 통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죄’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인간의 실수와 허물인 ‘죄(하마르티아)’가 권면을 거부하는 ‘완악한 마음(스클레로카르디아)’을 만날 때, 타인과 공동체를 부패시키는 고질적인 ‘악(포네리아)’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유일한 길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겸손히 ‘듣는 것’이며, 두세 사람이 모여 형제의 회개를 위해 드리는 ‘합심 기도’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가르침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지난주 본문의 주제가 공동체 안에서 죄를 바로잡는 문제였다면, 오늘 본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그렇다면 죄를 지은 형제를 과연 어디까지,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참된 제자도의 핵심 질문을 던집니다.
1. 베드로의 질문과 수량화된 계산 (21–22절)
오늘 본문은 수제자 베드로의 아주 현실적이고 당돌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1)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위대한 고백을 드렸고, 천국 열쇠를 약속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정작 삶의 현장에서 형제의 실수(하마르티아)와 완악함(스클레로카르디아)을 마주할 때, 베드로 역시 한계에 부딪혔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적 관습에서는 누군가를 세 번까지 용서해 주면 대단히 넉넉한 덕목을 갖춘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두 배가 넘는 ‘일곱 번’을 제시합니다.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자부심, 참된 제자로서 나 정도면 충분히 관대하다는 자만이 섞여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그 자기의(自己義)와 수량화된 계산을 완전히 깨부수어 버리십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2)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는 말씀은 490번이라는 횟수를 세라는 뜻이 아닙니다. 칠판에 분필로 490번까지 용서한 횟수를 적어 두다가, 491번째가 되는 순간 폭발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신학자 보링(Boring)이 지적했듯이, “누구든지 숫자를 세는 것은 용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처벌의 때를 기다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잘못의 기록을 장부에 간직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 13:5).
성경에서 ‘용서하다(aphiemi)’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돌려보내다’, ‘갈라놓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나를 얽매고 있는 분노나 복수의 감정을 돌려보냄으로써, 과거의 사건과 상처가 더 이상 나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도록 풀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용서를 수량과 조건의 틀에 가두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용서에 숫자를 매기는 순간, 제자는 은혜의 자리가 아닌 ‘재판관의 자리’에 앉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죄와 악, 그리고 용서의 상관관계 (23–34절)
이 무한한 용서의 당위성을 설명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지난주에 다루었던 죄와 악, 그리고 용서의 관계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왕은 일만 달란트라는 상상할 수 없는 부채를 진 종을 불쌍히 여겨(긍휼) 그 빚을 아무 조건 없이 전액 탕감해 주었습니다. 1달란트는 노동자의 6,000일 치 임금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헤롯 왕이 온 영토에서 거두어들인 한 해 총 세수(900달란트)의 10배가 넘는 금액으로, 한 인간이 평생 일해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무한대의 채무를 뜻합니다. 종이 자신의 무능력과 죄(하마르티아)를 인정하고 납작 엎드렸을 때, 왕은 탕감이라는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탕감받고 나온 그 종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자신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노동자 100일 치 임금) 빚진 동료 종을 만나자, 목을 잡고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의 60만 분의 1에 불과한,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작은 부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주에 살펴본 ‘악(포네리아)’의 본질을 다시 보게 됩니다.동료 종이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간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종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동료의 사정을 듣기를 거절하고 완악한 마음(스클레로카르디아)으로 목을 잡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왕)으로부터 무한대의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형제의 작은 허물에 대해서는 단 한순간의 긍휼도 베풀기를 거부하는 상태—이것이 바로 신학적 의미의 고질적인 ‘악(Poneria)’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분노하여 종을 고문관들에게 넘겨버립니다. 자신의 부채를 탕감받은 은혜를 까마득히 잊은 채, 남을 향해 무자비한 심판관 노릇을 하는 자에게는 종말론적인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3. 결론: 하나님의 절대 권한 인정에서 파생되는 참된 용서 (35절)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인 3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피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리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이 말씀 앞에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정의와 용서 사이의 긴장을 다루어야 하는가? 정의를 세우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가?”
많은 학자가 지적하듯, 비유 속 왕의 행동은 때로 낯설고 무섭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진짜 초점은 왕의 성품을 추상적으로 분석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제자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참된 제자의 길에서 용서란, 내 의지나 뛰어난 인품으로 짜내는 도덕적 결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용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용서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 권한과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에서만 파생될 수 있습니다.
- 심판의 권한을 하나님께 이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칠판에 숫자를 적어가며 마음속에 원한과 분노를 품고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내 삶의 왕좌에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이 앉아 있음을 뜻합니다. “내가 정의를 구현하겠다, 내가 저 사람의 잘잘못을 심판하겠다”라고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다스림(통치)을 침범하는 죄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판단과 심판의 칼자루를 오직 하나님께 완전히 넘겨드리는 겸손한 주권의 고백입니다. - 내가 탕감받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의 죄를 지었던 존재이며,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거저 탕감받았음을 온전히 수용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용서의 권한을 경험한 제자만이, 타인을 향해 긍휼의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통치(하나님 나라)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 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 왕의 핵심 법률이 바로 ‘긍휼’과 ‘용서’입니다. 형제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왕의 통치권에 대한 정면 반역입니다. 따라서 참된 제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내 분노와 억울함보다 하나님의 왕 되심과 그분의 통치 권한을 더 높이 올려드리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은혜 입은 자들입니다.
여전히 내 마음을 흔드는 형제의 허물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내 힘으로 용서하려 애쓰기 전에, 먼저 내 삶의 왕좌에서 내려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심판하고 갚아줄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를 인정합니다.” 그렇게 선포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우리를 얽매고 있던 분노의 사슬이 풀리고 하늘의 참된 평안이 우리 삶에 임할 것입니다.
한 주간,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내 안의 완악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와 권한을 기꺼이 인정함으로,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고 풀어주는 참된 제자의 길을 담대히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주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