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성령강림 후 제2주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까삐까삐 룸룸 소원은 한가지 – 이루어져라” 제가 어릴 때 정말 재밌게 본 만화영화노래입니다. 아직도 이 노래 만은 기억이 생생한 것 같습니다.
소원은 한가지 – 이루어져라!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이신가요? 여러분이 간절히 기다리는 일은 무엇이신가요?
우리의 소원은 ... 통일을 기다린 지 70년이 흘렀습니다.
이산가족의 기다림의 우리가 아는 기다림과 다른 의미가 아닐까요? 간절함이었다. 체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기다림에 목이 메어 한번만, 잠깐이라도... 이런 수없는 반복이 저들의 기다림이겠지요.
얼마 전 20년 동안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어머니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기다림은 단지 20년 동안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해 보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전 세계인의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제 끝나나? 바라고 기다린지 일년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 우리의 소원은 이루어질까요?
기다림이란 무엇인가가 이루어지는 바람이요. 무엇인가 이루어지는 시간을 말하기도 하지요.
결국 기다림이란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오밥 나무를 알고 계신가요?


바오밥 나무는 천년을 사는 나무라고 합니다. 천년을 사는 나무인 만큼 두꺼운 몸통의 지름은 약 9m에 이르고 높이는 10m 이상으로 종에 따라 20~30m 정도까지 자라기도 하는데 30m면 아파트 높이 만한 나무랍니다. 이 나무의 열매가 요즘 잘 알려진 피부미용 재료입니다. 그런데 이 열매를 맺기 위해선 꽃이 펴야하는데 적어도 20년 이상이 되야 꽃이 핀다고 하네요. 그리고 60년 정도 되어야 첫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합니다. 60년의 기다림 끝에 맺는 열매를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그 후 천년이 넘는 세월 한결같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을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오밥 나무를 심어 그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몇이 되지 않겠지요? 태어날 때 심었다한들 60살이 되어야 간신히 그 열매를 볼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아예 심지 않는 것이 좋을까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 바오밥 나무는 누군가에 의해 심어지고, 아니 누군가 심은 나무가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 우리가 심지 않은 나무를 통해 우리는 그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베드로후서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다림의 시기에 쓰여진 성경입니다.
성도들의 간절한 기다림은 바로 기독교 박해(persecution)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의 황제 네로는 64년 로마의 대화재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리고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 네로의 박해는 광기에 가까웠고 기독교인들을 향한 박해는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도들은 간절히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주여, 속히 오소서, 새 하늘과 새 땅, 주의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성도들의 기도는 그야말로 간절했습니다. 죽음보다 더 큰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성도들의 기다림은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그리고 3년 후 여전히 황제 네로의 박해는 계속됩니다.
성도들은 흔들렸습니다. 진정 주께서 오시는가?
그들은 절규합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가?
그 때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전하는 말씀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8절)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는 이 말씀은 시편 90편의 모세의 노래를 베드로가 인용한 부분입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입니다.” (시편 90:4)
이 말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데 오늘 말씀은 주께 천년과 하루가 같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9절로 이어지는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속히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그 기다림은 하루하루가 천년같이, 기다림이 더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베드로는 이러한 성도들의 생각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 즉 생각이 문제인데 주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때,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생각대로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이어갑니다. “그날은 도둑같이 온다.”(10절) 언제일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날을 모른다는 것을 또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반드시 오리리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13절)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요. 그것이 영원한 약속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아무리 기다림이 길다 할지라도 반드시 꽃은 피고 또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바오밥 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당부합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하는 것, 성도들이 해야할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11~12절)
소망을 품는 자들의 마땅한 행실이 바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생활과 삶이 거룩하고 경건하기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오직 주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할 때는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기로 주께 약속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된 삶, 그것은 오만하고 교만한 삶, 그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다르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구별된 삶입니다. 경건하다는 의미를 사전에서는 '어떤 것을 소중히 받들고자 하는데 있어 엄숙하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는 삶, 경건의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당부하는 말씀이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입니다.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말씀이 헬라어 성경에는 순결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최상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디 흠없는 깨끗한 생활을 하여, 부디 죄를 멀리하고 비난받지 않는 평강 가운데서 평안한 마음으로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성도들이 지금,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며 평화롭게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미혹에 이끌리지 말고 흔들리지 말라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리저리로 흔들리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말씀을 전합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바라기만 하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자라가는(growing)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바라는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단 한가지 마지막 소원은 “주님의 오심” “주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오심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며 동시에 오실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이미’와 ‘아직’이 동시에 함께하는 신비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이 땅에서의 기다림은, 이루지고 다시 또 기다리고 또 이루어지는,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그러하기에 삶의 모든 순간이 기다림이요. 또한 완성이기도 합니다.
이 신비한 일이 오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입니다.
그러니 더욱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그날이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