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찬 영광의 하나님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39번 시편 95편
(인도자)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회중)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인도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회중)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인도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회중)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인도자)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회중)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인도자)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회중)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인도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회중)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다같이)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1-7상)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28장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
말씀 _ 누가복음 18장 1~8절,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공의를 행하시지 않겠느냐?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말씀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비유로 설명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있으신가요?
무엇을 기도하고 있나요? 왜 기도하고 있나요?
C.S 루이스 책 <기도의 자리로> 소개문은 이렇습니다.
- 평생기도를 실천한 사람, C.S 루이스, 그가 온 삶으로 내디딘 기도의 행진
- 모든 것이 완전할 때가 아니라 오늘의 이 모습으로 기도하는 법
<기도의 자리로>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기도는 자동 판매기가 아니다. 마법이 아니다. 기도한 대로 받는 사람들을 일종의 왕에게 총애를 받는 신하로, 즉 왕이신 하나님께 말발이 서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더 심각한 문제다. 답은 겟세마네에서 거절당하신 그리스도의 기도로 충분하다.”
“평범하고 순수한 한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드리고자 무릎을 꿇는다. 그는 하나님과 소통하려 한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을 기도하게 하시는 분 또한 하나님이심을 안다. 즉 그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자신의 모든 지식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는 사실도 안다.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곁에서 그의 기도를 도우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신다. 하나님은 그가 기도드릴 대상이자 그의 안에서 그가 기도하도록 추동하시는 분이다. 즉 도달하려는 목적지이자 원동력이시다. 아울러 그분은 목적지로 향해 가는 길, 내지는 다리이시다.”
오늘의 비유는 17:20에서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질문인,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표현을 빌리면, 그 질문은 “언제 이 과부가 정의를 혜택을 입게 될 것인가?”이겠지요.
어느 마을에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그녀는 지금 원수에게서 벗어나 법으로 보호받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가 이 상황을 벗어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기도는 언제 응답받게 될까요?
이렇듯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언제 응답 받을지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기도하고 있는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더 기울합니다.
좀더 분명하게 정리를 해 보고자 C.S 루이스의 글과 과부를 비교해 봅니다.
기도는 자동판매기가 아니다. - 과부는 지금 자동판매기처럼 그녀가 기도를 하면 “뚝딱” 떨어질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있는가요?
기도는 마법이 아니다. - 과부는 지금 그녀의 삶에 마법을 바라고 있는가요?
기도한대로 받는 사람을 일종의 왕에게 총애받는 신하 – 과부를 왕에게 총애받는 신하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왕이신 하나님께 말발이 서는 사람 – 과부가 하나님께 말발이 서는 사람인가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 과부는 기도를 적어도 자동판매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기도가 자동판매기가 아니어도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여인입니다.
2. 과부는 마법과 같은 기도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기도는 마법이 아니라 울부짖음이요. 생명입니다.
3. 과부는 왕의 총애를 기대할 수 있는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기도가 응답 받았다는 것은 그녀에게 생명 그 자체일 뿐, 과시할 수 있지 않습니다.
4. 과부는 그녀의 행실로 하나님께 말발이 서는 상황이 아닙니다. 과부라는 그녀의 상황이 결코 자신이 해 온 일들로 협상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저 밤낮으로 매달릴 뿐입니다.
기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시길 바랍니다.
그럼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통해 알게 된 기도는 “공의”를 위한 기도입니다. 비록 밤낮으로 매달려 찾아가 매달리는 재판관이 불의하다고 하여도 과부는 불의한 재판관이 지칠 때까지 매달립니다.
3절 말씀입니다.
또 그 마을에는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재판관을 계속적으로 찾아가서 탄원하기를 ‘내 원수에게서 나를 법적으로 보호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한글 성경에서는 3절과 5절, 7절과 8절에 같은 단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3,5절과 7,8절에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공의>ἐκδικέω / ἐκδίκησις입니다. 이 단어는 δίκη (dikē, 정의, 판결)**와 접두사 ἐκ- (밖으로, 드러나게 하다)의 합성어입니다.
즉, ‘공의를 드러내다’, ‘정당한 판결을 내리다’의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보복(revenge)보다는 억울한 자에게 정당한 정의를 회복시켜 주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적인 복수를 뜻하는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당한 판결로서 공의를 이루다”의 의미가 더 큰 것이지요.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면 동사(3,5절)에서 <공의>를 요구하는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했고, 누군가를 찾아갑니다. 그녀가 찾아간 사람이 재판관입니다. 예수님은 이 재판관을 불의한 재판관일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그녀가 계속 찾아오는 것이 지쳐서라도 그 불의한 재판관은 <공의>를 베풀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7,8절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친히 택하신 사람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공의를 행하시지 않겠느냐?”
다시 정리하여 말씀드리면
3,5절에서 공의를 구하는 이가 있습니다. 여인입니다. 억울한 사연, 픽밥받는 여인은 <공의>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공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공의를 그저 구하는 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기도>이지요.
7,8절에서 공의를 베푸는 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여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3,5절에서 이 여인에서 사람들은 공의를 저버립니다. 여인에게 불의를 향하지요.
7,8절에서 이 여인에게 공의를 베푸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기도를 통해 이 비밀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누가는 과부를 통해 그의 공동체에서 최후의 심판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이 기록된 시기는 환난과 계속해서 싸우는 시기이며 신실한 자들의 변호를 갈망하는 시기입니다. (사도행전 11:19;14:22;20:23) 그러므로 기도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11:4b), 믿음의 실패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22:46) 필요한 수단들(means)입니다.
“왜 너희는 자고 있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기도하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택하신 사람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공의를 행하시지 않겠느냐? 오랫동안 미루시겠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속히 공의를 행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의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학자 Culpepper는 다음과 같은 성찰을 제공합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의 비유는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는 귀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와달라는 요청을 들으실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했는가? 믿음은 과부와 재판관에게서 다른 반응들을 요구한다. 믿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우리에게 겨자씨 믿음, 과부의 믿음이 있는가?
비유에서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재판관이다.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고 사람들,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한 것일 수 있다.
‘밤낮으로 계속 기도하라’고 권면할 필요가 거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에 신실한 기도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너무도 간절한 기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믿음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여인에게서 ‘믿음’을 보게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정의를 확신하고, 그 확실성을 기대하면서 확고한 신실함(resolute faithfulness)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있는 것은 단지 ‘믿음’이 아니요. ‘믿음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과부는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놀라운 주도권을 가지고, 정의를 위해 재판관을 계속해서 찾아갑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보기를 희망하는 이 믿음은 어떤 것인가요?
“믿음”이 정관사에 함께 사용된 유일한 곳이 오늘 말씀입니다. 모든 다른 곳에서 이 단어는 정관사 없이 사용됩니다. 이를 많은 주석자들은 믿음을 지니는 것으로, 그리고 온전함이나 완결의 “종점”(endpoint)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성숙, 완결, 온전함을 향해 진보하는 믿음이나 믿음의 “단계들”을 인정하는 어떤 다른 용어가 우리 마음속에서 단지 올바른 것들을 믿는 것 훨씬 그 이상의 믿음으로 묘사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주에 10명의 나병환자에 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한 명의 나병환자(15-16절)는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는 말을 들었지요.(19절). 그리고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는 바리새인의 질문(17:20)에 대해 예수님은 17:21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돌아와서 하나님을 찬양한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적합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믿음으로 인해 깨끗해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얻었는데, 그것은 침입해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통찰입니다. 그는 보게 되고, 각성하게 되는 데 그 자체가 구원의 상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믿음의 눈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징조들을 잘못 해석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보지 못합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자가 오실 때에 우리에게서 믿음을 찾으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