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 성령강림 후 제16주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 출애굽기 16장 말씀을 전합니다.

엘림에 머물던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떠납니다.  70그루의 종려나무와 12개의 샘이라도 그 곳은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가야하는 곳은 가나안(Canaan)입니다. 가나안은 ‘낮은 땅’이란 뜻으로 팔레스타인의 옛 이름입니다. 레바논과 수리아 남단에서 가자 지역 남쪽 애굽 시내까지 이르는 땅으로, 요단 강 서쪽 전지역을 일컫는데, 성경에서는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삿 20:1; 삼상 3:20)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땅은 이스라엘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했던 그 땅이지요. (창 12:7; 15:18; 출 6:4; 신 11:24)

흔히,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약속하심이 신약에서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 말씀이 반드시 누군가에게 약속하신 말씀이요.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말씀으로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성경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시고 마침내 이루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 시간이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 같습니다. 내 마음과 내 뜻대로 내가 바라는 그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목적지가 어디일까요? 우리가 목적지를 알고 있다면, 우리가 그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이는 분명 그 약속이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우리의 이야기라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목적지는 바로 가나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로 왔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 두 번째 달 15일이 되는 날이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난 지도 1달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력 첫째 달 14일, 그 밤 유월절을 지나 그들은 이집트를 떠나  1달이 되는 두 번째 달 15일에 광야에 서 있습니다.

광야(曠野, wilderness)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세 번째 원망을 쏟아냅니다.

첫 번째, 홍해 앞에서

두 번째, 수르 광야 마라에서

세 번째, 엘림을 떠나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상황, 우리의 상황이 항상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 그 상황이 우리를 언제나 두렵게 하는 것 같습니다.

광야를 국어사전에는 텅 비고 아득하게 넓은 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텅 비고 아득하게...

척박하고 메마르고 쉴 곳 하나 없는, 광할한, 아무것도 없는 땅, 사막,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왜? 왜? 우리를 이끌고 나온 것입니까?

그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비처럼 내려 줄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분량만 모아들이도록 해라.”

12개의 샘이 있었던 엘림을 떠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서 있는 광야에서,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들의 원망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다.”
“저녁이 되면 너희가 고기를 먹을 것이요. 아침이 되면 빵을 먹고 배부를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원망하게 된 그 진짜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여호와를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서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광야에 아득해져 그들을 이끌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그 어디를 보아도 생명이라곤 살 수 없을 것 같아보이지만

그 광야에서도 찬란히 꽃이 피는, 아름다운 비밀

우리의 상황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원망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만나를 먹으며
이 고기를 먹으며
내가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여성신학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하나님, 그의 자녀를 위해 친히 먹으시는 하나님, 원망하는 그들에게도

마치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엄마 여기 있다. 그래 여기 있어.”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만나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만나(manna)의 뜻은 ‘이것이 무엇이냐?’입니다. 흰 서리같이 고왔고 진주 같은 모양이었으며, 밤 이슬처럼 내려(민 11:7-9) 이슬 속에서 채집하였는데(출 16:4) 꿀섞은 과자처럼 맛이 있었고, 깟(고수풀)씨 같았다(출 16:31)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만나를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맛 볼 수도 없습니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만나,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도 이렇게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지금 우리에게 만나는 무엇일까요?

다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양식,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척박한 상황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나를 먹으시는 그 분, 유일한 그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어야하는 이유, 말씀을 알아야하는 이유, 말씀을 먹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호와를 기억하고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우리가 서 있는 땅이 광야와 같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보내셨습니다.

만나를 보내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마침내 말씀하신 그 땅, 우리들의 목적지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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