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강림절 제1주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강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되는 강림절(降臨節, Advent)은 기다림의 계절이며 동시에 속죄와 참회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주여, 속히 오소서. 우리에게 오심을 간절히 바라는 기다림의 절기, 강림절입니다.
누가 주님의 오심을 기대할까요? 진심으로 주의 오심을 기대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 이사야(Isaiah)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의 강림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출애굽기 19장을 통해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에게 오셨음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출애굽기19:18~19)
“주님께서 하늘을 찢어 열으시고 내려오시면 주님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렸습니다.”(이사야64:1)
주의 강림을 알고 있는 자들, 즉 말씀을 듣고 보고 알고 있는 이들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주여, 그 때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향하였던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주의 은총을 지금도 믿고 있는 이들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간구하는 자들입니다.
“원하건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여 주십시오.”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이사야64:2)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이 원수 앞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둡고 슬프고 고통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여, 도우소서. 우리에게 오소서.”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왕 등 5명의 왕이 통치하던 시기의 선지자입니다.(BC739~680)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 왕국으로 분열됩니다. 분열 왕국 이후 이스라엘은 끊임없는 주변 나라들로부터 위협과 전쟁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시기에 북이스라엘에서는 7명의 왕이 교체되고 호세아 왕 때 북이스라엘은 마침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게 됩니다(B.C. 722년경).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을 공포와 혼돈에 빠뜨렸고 앗수르에 의한 주변 나라들은 급격히 재편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멸망의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끝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도 소망이 있을까요?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마지막 남은 구원의 손길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메시야(Messiah) ‘기름 부음받은 자’란 뜻으로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서를 단 하나의 단어로 이야기하자면 바로 “메시야”일 것입니다.
그가 오심으로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7)
그 구원을 기다리는 절기가 강림절의 의미입니다. 메시야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전심으로 기다리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사랑하시는데 이스라엘은 범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죄 가운데 있었으니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습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휩쓸어 갔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고 주님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자도 없습니다.(이사야64:5~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는 시대는 우리의 시대와 많이도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우리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로서 정결하고 깨끗한 영혼을 위해 겸허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주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서는 성막, 주의 성전,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하여는
허탄한 것들, 우리들의 허영심과 거짓과 탐욕과 욕망, 위선과 기만을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애써 주를 붙잡는 자가 없다고 이사야는 탄식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전심으로 스스로 주를 애써 붙잡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의 뜻과 세상의 가르침은 너무도 다르고 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거대하고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쩔수가 없다고 스스로 변명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 앞에 나아갈 수 없어지고
우리의 죄악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 때 이사야는 다시, 주께 간구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주의 얼굴을 보여 주옵소서! 이사야의 간구는 이렇게 간절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이사야64:8)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입니다.(이사야64:9)
“주여, 우리에게 오시옵소서.”
해마다 성탄절이면 거대하고 반짝이는 성탄트리 앞에서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즐거워하는지? 참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들은 그 의미는 모르지만 덩달아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이겠지요?
한 마을에서 결혼식이 열립니다. 그 신부와 신랑은 몰라도 마을은 온통 결혼식 준비에, 잔칫상 준비에 들떠 있습니다. 그렇게 온 마을은 흥겹고 즐거워집니다. 마을 사람이라면 아니, 지나가던 나그네라도 그 마을에 지나던 행운으로 국수 한 그릇 나눠 먹으며 노랫소리 흥겨운 날,
그런 날이 예수님의 탄생일, 성탄절입니다. 모두가 흥겹고 즐거운 잔칫날, 그래서 누구라도 국수 한 그릇 뜨끈하고 먹고 누구도 빠지지 않도록 이사람 저사람 불러 다니느라 분주하게 즐거운 날이 성탄절의 기쁨인것이지요.
그런데 이 잔칫날에도 주인이 있습니다. 손님이 있고요. 그렇습니다. 이 잔치를 여는 사람들, 잔칫날의 주인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잔치를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온 동네 큰 기쁨을 나눠주는 잔칫날의 주인, 저들은 손님이고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저들이 즐거워야 하는데 이제 주인은 없고 주인 없는 잔칫날에 손님들만 시끄러운 날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요? 주인 없는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온 마음과 정성으로 준비하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이 강림절기가 간절한 기다림과 속죄와 참회의 고백으로 진정으로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절기가 되기를,
이 아침이 그 처음이요, 시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