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1장 다 찬양하여라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45번 시편 108편
(인도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회중)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인도자)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회중)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인도자)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회중)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인도자)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회중)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인도자)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회중)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다같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1-6)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14장 내 모습 이대로
말씀 _ 마가복음 10장 35~45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다가올 수난을 다시 선언하신 후에,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라다” (thambeomai)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마가복음에만 발견되는데 (1:27;10:24). 이 단어보다 더 강한 표현(ekthambeomai )도 마가복음 9장 15절, 14장 33절, 16장 5,6절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놀람”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는 사건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제자들의 “놀람”이나 “충격”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는 전에 그들에게,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8:31). 그 일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은 아마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 일을 하실 것을 알고 계시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을 계속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예수의 사명에 관해 잘 몰랐더라도 충분히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모인 많은 사람들과 달리 예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 즉 그의 삶과 죽음의 목적에 관해 확신하고 있었고, 아무 것도 그 사명의 성취를 막을 수 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또한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하나의 모범사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측면과 관련하여, Herold Percy이 작성한 “복음의 사람들”이란 짧은 글은 “유지”와 “사명” 사이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유지인가, 선교인가?
- 유지하는 회중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갈등을 피하려고 애쓰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한다.). 선교하는 회중은 갈등이 발전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그 대가를 지불한다. 모든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것이 일부의 상심을 유발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막지 못한다.
- 유지하는 회중에서 리더십 유형은 주로 관리적이다. 거기에서 리더들은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유지하고 원활하게 운영하려고 노력한다. 선교하는 회중의 리더십 유형은 주로 변혁적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미지의 상황에 맞서 도전한다.
- 유지하는 회중은 그들의 회중을 구원하는 방법에 관해 생각한다. 선교하는 회중은 세상에 다가가는 방법에 관해 생각한다.
우리들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고방식으로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지와, 선교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점검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고방식은 "선교"에 있습니다. "선교"적 사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지"적 사고를 하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계속 우리의 사고방식을 고집한다면 우리의 사고방식 안에서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선생님,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예수께 나아왔을까요?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 바라느냐?” (36절)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때 우리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 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과 야고보, 요한의 대화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란다고, 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앞서 우리의 사고방식대로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면 절대 깨달을 수 없음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대단한 그 일을 바란다는 것은 결코 그 일을 이룰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일,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소명은 소명이 되는 것이지, 내가 정한 소망이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볼 순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은 43~45절 예수님의 말씀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지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변모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때 아마도 예수의 좌우편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는 광경을 자신들의 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지요. (9:2-8).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두 사람에게 그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십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단계들(steps)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강아지를 요구하고 돌보겠다고 약속하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무엇을 요구하는지, 어떤 것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가를 알지 못하지요.)
우리도 “우리는 성장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지역사회에 다가가길 원한다,” 등과 같은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런 영광스러운 일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단계들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유지와 선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잔을 마시고 세례로 세례를 받는 것(DRINKING THE CUP AND BEING BAPTIZED WITH THE BAPTISM)
Lowe & Nida는 “세례로서 세례를 받는다”는 문구가 “어떤 어려운 경험이나 고된 시련에 휩싸이다”는 뜻의 관용구라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밥티조(baptizo)가 “잠기다”란 뜻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물에 잠기는 이미지는 큰 고통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들어 왔나이다.”(시편69:1;참조 69:2, 14-15절).
38절과 39절 두 곳 모두에서 ego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마시고, 세례받는 것은 “나”임을 강조한다. 이 점을 강조하려면, 38-39절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직접 마시고 있는 잔을 너희가 마시게 될 것이고, 내가 직접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게 될 것이다.”
마시고, 세례를 받는 것이 예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면(현재시제), 그것들은 단지 순교 이상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예수(또는 회중)의 사명에 대한 비전을 이해하지 못하는(깨닫기에 실패한) 제자들을 “참고 사는”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예수는 40절에서 그가 모든 것을 알거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가 모든 것을 알거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오직 아버지께서만 아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를 신뢰할 뿐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는 그의 우편과 좌편이 누구를 위해 준비되었는지 알지 못하시며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것을 줄 능력이 없으십니다.
예수께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새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려고 왔기 때문이다.”
대속물(속전)
예수께서 제공하는 섬김은 그에게 수여된 것 이상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모든 사람을 위한 속전(대속물)으로 제공하셨습니다.
속전(대속물)을 뜻하는 단어인 라이트론(lytron)은 오늘의 본문과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만 등장합니다. 이는 한 명의 노예를 자유롭게 위해 지불된 값을 가리키고 관련 단어들은 “속량” 또는 “구속자”로 자주 번역됩니다.
예수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사야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왔다. 내가 너희의 질고를 짊어지기 위해 왔다. 내가 너희의 범죄 때문에 상함을 받기 위해 왔다. 내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너희 인생을 축복하기 위해 왔다. 너희는 내 축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너희는 나를 정죄하길 원할 수도 있다. 너희는 나를 죽이길 원할 수도 있다. 좋다. 마음대로 해라. 너희는 나를 세상에서 밀어내 십자가를 향하게 했다. 나는 너희를 축복하기 위해 십자가를 질 것이다. 나는 너희를 축복하기 위해 지옥을 지나갈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나의 생명을 대속물(속전)으로 주기 위해 왔다.” Richard Jensen [마가복음 설교하기 p.163]
한강의 작가가 인터뷰 중 이런 이야기를 하였답니다. 이렇게 영상물이 넘치는, 이렇게 디지털화되는 세상에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실 것 같다는 질문자에게 “저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종교는 없지만 저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 문학작품은 분명 영상물과 다른 그 문학의 역할이 있습니다. 문학은 인간과 신의 대화(유진운일의 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쓰고 싶고...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영혼을, 신을 믿는지요?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대속자가 되셨음을 진정으로 동의하십니까?
오늘 말씀으로 깊이 묵상하시는 주일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찬양 _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