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60번 시편 139편
(인도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회중)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인도자)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회중)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1-4)
(인도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회중)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고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도자)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회중)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7-10)
(인도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회중)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322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말씀 _ 마가복음 10장 17~30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은 가시떨기 사이에 뿌려진 씨앗의 실제적인 한 사례입니다. 예수께 나아온 그 사람은 말씀을 듣기는 했기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는”(마가4:19) 사람입니다.
길에서(17절)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17절 말씀에서 “길”은 오직 마가의 기사에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길”(hodos)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넓은 도로”나 “좁은 도로”(4:4,15) 또는 그 도로를 사용하는 과정인 “여행”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람의 “인생 길”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이사야서의 인용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1:2,3). 예수는 (헤롯당이 보낸 사람들에게서) “오직 진리로서 하나님의 도(the way)를” 가르친다는 찬사를 받으셨지요.(마가12:14).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길”이라는 이 단어는 세 번의 수난 예고 앞뒤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첫 번째 수난 예고 전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8:27)고 물으실 때 “길”을 가는 중이셨습니다.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는데(9:33,34). 두 번째 예고 후이지요.
예수께서 세 번째 예고를 하실 때,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10:32).
마가가, 우리에게 예수님의 길, 즉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이 단어를 사용했다면, 그 때 우리는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게 될 예수와 자기의 소유를 나눠줄 수 없는 부자를 대조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길”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예수께 달려와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그가 다시 대합니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바라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가세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위와 같은 대화에서 이 사람에게는 그 배후에 어떠한 유형의 “종교적인”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지를 아는 고대의(지금도) 열쇠들 가운데 하나는 성공, 특히 경제적 성공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부요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의 편에 계신다는 징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풍성한 곡식, 많은 자녀, 건강한 신체와 생각, 좋은 친구, 주머니 속에 돈이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당신 편이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이 바라는 것을 주셨다는 징표로서 해석되었지요. 여러분은 어떠하신가요?
“축복”(blessedness)에 대한 이런 해석은 특히 내세를 믿지 않는 종교들 사이에서, 이를테면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믿지 않은 유대의 사두개파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두드러졌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종교의 두 가지 극단적인 두 관념, (1) 계명을 지키면,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과 (2) 개인의 재산은 하나님의 은총의 증표라는 것에 제동을 걸고 계십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모든 계명을 지켰고, 그가 그런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부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방법들로서의 신조, 제의, 또는 행동이라는 종교적 방법들에서 그를 탈출하게 하고 계십니다.
한 사람이 모든 “선한 일”을 다 행했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과 비교할 때 결코 “선하다”고 판단을 받을 순 없습니다. 그가 모든 계명에 복종하고, 엄청난 재물의 축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영생을 상속받기에 충분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는 지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보시고, 그 사람에 관한 진실을 아십니다. 우리의 행위, 그 깊은 내면을 예수는 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스럽게 여기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알지, 그런데 한 가지가 부족하단다.”
한 가지 부족한 것(21-22절)
예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팔 수 없는 것인가?
그가 가난한 자에게 줄 수 없는 것인가?
그가 세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와서 예수를 따를 수 없는 것인가?
그가 “많은 소유물”을 갖고 있거나, 그가 이 소유물에 너무 집착을 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충분한 소유물보다 “많은 소유물들”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얼마나 어려운지?(23-24절)
마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거나 힘들다는 말씀이 두 번 등장합니다.
먼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어려운 걸까요?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만큼 쉽지요. 그래서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대답은 “불가능하다”가 됩니다.
우리는 불가능하다.가 정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가 우리를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지요.”
그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너는 안되지만, 나는 된다.”
인간적인 가능성의 여러 가지 사례들: 나는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 등
이 말씀에 대하여 Williamson (Mark Interpretation Commentaries)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애들아”라고 부르신 것은 비록 다른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앞 단락에서 어린아이들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가르치신 것을 떠올리게 한다. 10:13-16과 10:17-27 사이의 관계는 대조이다.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야만 한다는 원리가 설정되고 있다(10:15). 10:17-27에서 부자의 질문뿐만 아니라 예수의 대답도 또한 사람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0:13-16의 내용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쉬운 것으로 묘사하고, 제자들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다. 10:23-27에서 예수는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시고, 거기에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한글표준새번역)는 말을 덧붙이신다. 이 마지막 말은 대조를 모순에서 역설로 바꾸어 놓는다. 하나님 나라나 영생이나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우리의 최고의 순종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만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생명을 성취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런 생명과 온전함을 가능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며, 우리는 그것을 선물로서만 받는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노력할 때, 마가복음 10:17-31의 메시지를 규정으로 간주하여 일반화하고 영적으로 적용하며, 그 과정에서 참되고 도움이 되는 많은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급진적인 본문의 긴장은 부와 관련하여 모든 제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는 것을 거절한다. 우리가 이 본문이 우리의 가치 체계를 덜 불편하게 만드는 말을 하게 위해 최선을 다한 후에 예수는 우리를 집중적으로 바라보시며 생명은 재물을 쌓아 둠으로써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움으로써 얻는 것임을 조용하게 확인시켜 주신다. 우리 문화의 주도적인 목소리와는 달리, 마가복음의 제자직에 관한 전반적인 가르침과 일치하게 이 본문은 진정한 부자가 되는 길은 부에 대해 죽는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
이 메시지에서 놀람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거나, 충격, 공포, 슬픔, 놀라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그 메시지를 듣지 않았거나, 너무 자주 들어서 더 이상 진정으로 듣지 않는 것 둘 중의 하나이다. [p. 188]
우리는 부자 청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단지 장면에서 사라졌지요. 어쩌면 나이를 먹으면서 더 인색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탐욕 때문에 모든 것이 쓸모없게 되자,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군중들 속에서 십자가 밑에 있거나, 오순절 날에 한 명의 청중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무명의 복음전도자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어떻게 되길 바라시는지요? 그 결말은 저와 여러분의 ”길“이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그 결말이 우리교회의 하나된 사명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찬양 _ 찬송가 515장 눈을 들어 산을 보라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