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1장 다 찬양하여라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63번 시편 145편
(인도자)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회중)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인도자)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회중)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인도자)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회중)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인도자)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회중)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인도자)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회중)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1-10)
송영 _ 찬송가 2장
기도 _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18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말씀 _ 마가복음 12장 38~44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개의 이야기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38-40절의 “서기관들”과 41-44절의 “과부”가 등장합니다. 흥미로운 것인 서기관들을 과부의 집들을 삼키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는 표현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시작하실 때에도 아니, 처음부터 과부들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리치시는 예수님께서 서기관은 조심하라고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것도 꼭 집어 “서기관”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서기관, 율법학자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1. 긴 옷을 입고 돌아는 것을 좋아 함.
2.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을 좋아 함.
3.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 함.
4. 잔치에서 윗자리에 앉는 것을 것을 좋아 함.
5. 과부의 집들을 삼킴.
6.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 함.
오늘날, 지금 이러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1~6번까지 중 굳이 죄라고 할 만한 부분이 있을까요? 5. 과부의 집을 삼킴, 이 부분을 제외하고 (서기관의 입장에서는 제가 언제 그랬냐? 억울할 수도 있을텐데요.)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태도를 갖고 있지 않을까요?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다면 “조심하십시오” 위와 같은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십시오.
서기관들
“서기관(scribe)”으로 번역된 헬라어는grammateus 로서 “쓰다”는 뜻을 지닌 단어인 grapho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고대 근동의 여러 국가들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단순한 필사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칭호는 “교육을 받다”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전 1장20절에서 “서기관”이 “지혜 있는 자”와 “변론자”로 등장합니다.
누가 5장 17절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nomodidaskalos)이 사용되고 있고, 조금 뒤에 같은 배경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5:21)이 등장한다. 따라서 그 이야기에서 서기관들은 율법 교사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기관’은 “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대표로 “서기관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풍자를 통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비판하시는 것은 그들의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려는 그들의 욕망(thelo, 38절, NRSV에서는 “좋아하는 것”으로 번역함)에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도 그들의 마음속 욕망과 욕구입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즉,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그들처럼 되지 말라.”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Ched Myers(Binding the Strong Man: A Political Reading of Mark's Story of Jesus)는 두 가지 해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표현이다. 서기관의 풍요는 “길게 기도한다는 구실로 과부의 가산을 삼킨 결과이다(12:40). 이 신랄한 완곡어법을 해석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Derrett("'Eating up the Houses of Widows': Jesus' Comment on Lawyers?" NovTest, [1972] 14, pp. 1ff.)는 마가는 (여자들로서 죽은 남편의 재산을 관리할 수 없었던) 과부들이 유산의 관리를 서기관들에게 위임하는 관습을 언급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오래 기도한다는 구실로 얻은 사회적 명성과 신뢰로 말미암아 서기관들은 재산을 관리하는 법적 권리를 획득했을 것이다. 그들은 관리에 대한 보상으로 대개 유산의 일부를 받았고, 이 관행은 횡령과 남용으로 악명 높았다. 이 경우에 여기서의 이슈는 예수께서 마가복음 7장 9-13절에서 반대하신 고르반 관습과 비슷했을 것이다. 토라 유대교의 소명은 “고아와 과부들을” 보호하는 데 있다. 하지만, 경건성이란 명목아래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이 계층들은 착취를 당했고, 반면에 서기관 계층은 계속해서 기부를 받았다.
하지만 Fledderman["A Warning About the Scribes (Mark 12:37b-40)." CBQ, (1982) 44, pp. 52ff.]은 “기도”와 “강탈(강도짓)”에 대한 마가의 설화적 반대개념에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기관이 기도한 장소는 성전이고, 성전의 비용은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탈취한 것이다. 성전에서 그런 착취가 행해지는 것을 맹렬하게 반대하고, 기도의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 예수는, “과부의 적은 돈”을 하나의 예화로서 암시하신 것이다. 설화적 분석에 의하면, 이 해석이 아마도 더 확실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두 해석 중 어느 경우이든 본질적인 요지는 동일하다. 다시 말해, 서기관의 경건은 경제적인 편의와 착취를 위한 얄팍한 가면이라는 것이다. 마가는 이런 남용의 전적인 책임을 서기관들에게 묻고, 복음서에서 가장 가혹한 말로 그들이 훨씬 더 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비교9:42) [pp. 320-321]
서기관의 경건은 경제적인 편의와 착취를 위한 ‘가면’이라는 부분을 깊이 고민해 보아야합니다. “경건”이 가면이라면? “직업”이 가면이라면?
경제적인 편의와 착취를 위한 얄팍한 ‘학벌’과 ‘직업’ ‘지위’를 조심하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더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정의를 위해 기도하는 척 하면서, 회개의 ‘가면’을 쓰고 “과부의 집을 삼키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들을 집어 삼키려는 욕망을 숨기고 기도하는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는 이 서기관들이 더 중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첫째되는 계명을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온 마음을 다하고 온 목숨을 다하고 온 정신을 다하고 네 온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경제적 편의보다, 이익보다, 지위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과부들
성서주해사전(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은 “과부들”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를 제외한 모든 법전에서 과부는 상속의 권리를 갖고 있다. 히브리 법전에서 과부는 완전하게 무시된다”(T.J. Meek, Hebrew Origins). 이 이상한 무시의 한 가지 이유는 아마도 노인이 되기 전에 죽는 것을 재앙으로 보고, 그 죄에 대한 심판이 생존해 있는 아내에게 확장되었다고 보는 히브리인들의 신념일 것이다. 그러므로 과부가 되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었다(룻기 1;20-21;이사야 54:4). 또 한편 여러 법들은 과부의 곤경을 고려하거나 과부의 존재를 인정한다.
성서가 과부에게 관심 갖는 것은, 공동체에서의 과부의 열악한 위치 때문에 돌봄이 필요했다는 증거이다. 과부는 자선과 정의의 행동에 의해 그녀에게 제공되었던 사회적 동정심의 보호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vol. 4, p. 842]
과부들(과 여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서기관’과의 대조일 것 같습니다.
41-42절에서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의 명확한 대조가 드러나 있습니다. “많은 것”(polys)을 넣는 “많은”(polys) 부자들과, “한 명의” 가난한 과부 사이의 또 다른 대조도 보입니다. (polys는 또한 37b절에서 “큰” 무리에 관해 사용된다.)
이렇게 보면 “많음”과 “적음”, “부자”와 “가난한 과부”만을 살펴보게 되지만 41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 편에 앉으셔서 그들이 “어떻게” 돈을 집어 넣는가를 보고계셨습니다.
대부분의 역본들은 어떻게 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넣는가를 쳐다보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헌금을 하는가를 바라보는 중이십니다.
그들이 기쁨이 넘치는가? 슬퍼하는가? 과시하는가? 겸손하게 드리는가?
어떻게 헌금함에 그들의 돈을 넣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를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통해 알게 됩니다. 아니,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을 보고 배우고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새에 “가면”을 쓰게 됩니다.
오직 예수를 따라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다시 한번 소망합니다.
찬양 _ 찬송가 405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