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하나님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63번 시편 145편
(인도자)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회중)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인도자)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회중)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인도자)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회중)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인도자)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회중)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인도자)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회중)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1-10)
송영 _ 찬송가 4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371장 구주여 광풍이 불어
말씀 _ 마가복음 1장 21~28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마가복음 1장 14절~ 3장 6절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을 시작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긴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A. 예수의 권위와 바리새인들의 보지 못함(맹목) (1:14-3:6)
1.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1:14-15)
2.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심(1:16-20)
3. 귀신들과 질병에 관한 예수의 권세(1:21-45)
a) 가버나움에서의 시작(1:21-28)
b) 베드로의 장모의 치유(1:29-31)
c) 다른 치유사건들(1:32-34)
d) 가버나움을 떠남(1:35-39)
e) 나환자의 치유(1:40-45)
4. 죄와 율법에 관한 권세(2:1-3:6)
a) 중풍병자의 치유와 용서(2:1-12)
b) 레위를 부르심(2:13-14)
c) 죄인들과의 교제(2:15-17)
d) 예수와 금식(2:18-22)
e) 안식일 위반들(2:23-28)
f) 손 마른 자의 치유(3:1-6)
그 중 오늘의 본문은 가버나움의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한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우리’가 아니라 ‘그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들어가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그 곳에 갔을 때, 마침, 그 때에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일 것입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 말씀하셨고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고 18절에서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버나움을 찾아 가셨습니다.
가버나움(Capernaum)은 ‘나움(위로)의 마을’이란 뜻입니다. 갈릴리 호수 북서 해안의 성읍으로 신약에만 언급되는 성읍인데, 이곳은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세관이 있는 큰 성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세리 마태는 이곳 가버나움 세관에서 제자로 부름받았지요.(마 9:9-13).
예수께서는 이 마을에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특히 백부장의 중풍병 걸린 하인(마 8:5-13),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마 8:14-15), 들것에 실려 온 중풍병자(막 2:1-12) 그리고 왕의 신하의 아들(요 4:46-54) 등을 치유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이곳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과 관련하여 생명의 떡에 관하여 그리고 많은 다른 말씀들을 전해주셨습니다.(막 9:33-50).
하지만 이런 놀라운 기적과 교훈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가버나움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마 11:21-24; 눅 10:15) 그래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사람들, 회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가버나움으로 비유하거나 더 나아가 저주받은 도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2019년 영화 ‘가버나움’은 떠울려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갈릴리 북쪽에 있던 이 마을을 예수와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방문했을 것입니다. 가까운 곳, 잘 아는 곳, 그곳에서 시작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였을테고, 또 그것은 가까움에 대한 애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고 그곳 회당으로 들어 가,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가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고”(21절)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매우 놀랐다.”(22절)
사람들이 놀란 이유가 짐작이 가시나요? 사람들이 놀란 이유를 마가는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이 있게 그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른다고 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율법학자들은 그곳에 모인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기에(또는 진정이 없었기에) ‘권위’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놀랐고 거기 함께 있던 ‘그’가 소리칩니다.
“나사렛 예수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멸하려고 오셨습니까?”
우리는 오늘 이 장면에서 거룩한 날(안식일)에 거룩한 장소(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을 만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를 보고 있습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이 있는 것에 놀라셨습니까? 더러운 귀신이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부르는 것에 놀라셨습니까?
‘악’은 언제나 ‘선’을 알아봅니다. 아니 어쩌면 ‘악’이기에 ‘선’을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를 사람들은 그의 ‘권위’에 놀라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 사람은 ‘거룩한’ 예수를 알아봅니다. 그 때 우리는 ‘악’을 이길 힘이 있습니까?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그’가 소리칩니다. 그는 소리지르며 다음과 같이 복수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24절). ‘악’은 자신이 세력임을 알리고 동시에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이름을 부름으로써 예수를 통제하고자 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은 ‘더러운’것과 상관이 없다. 그러니 나를 두고 떠나라! 그러나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이신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해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신학자 Myers는 위의 관점에서 이런 간략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예수는 아픈 사람/부정한 사람들에게, 이 상징적인 질서가 부정하는 사회적 완전성을 회복시켜 주려고 늘 시도한다. 따라서 예수가 아픈 사람/부정한 사람을 고쳐주신 것은 실질적으로 그들과 사회적으로 교제하신 것에 해당한다” [p. 146].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상징적 행위들이 강력한 힘이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자연의 법칙에 도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실존이라는 구조 자체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Douglas의 용어를 사용하면, 그의 치유와 귀신축출은 지배적인 상징적 질서를 “폭로하는” 기능이 있다. 예수는 이 질서가 삶을 비인간화할 때, 그 질서에 도전하고 그 제약을 철폐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의 “기적들”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이다. 지배질서에서 자신의 지위에 의존하는 사람은 기적들을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인 것(더 나쁜 의미로는 이단적인 것)이나 해방시키는 것으로 인식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그들의 해방이 말하거나 걷는 것에 의존한다고 믿지 않는 많은 이들이 있다. 신체적으로 장애가 없는 독자들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성서의 “치유” 설화들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들을 깨달아야 한다. “온전함”에 대한 생의학적인 정의를 강조하는 그 어떤 해석에서든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이들을 복음에서 배제시킨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병과 치유에 대해 더 폭넓은 사회적-상징적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에게 복음으로 다가 온다. 결국, 마가복음에서 제자직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참된 장애는 신체적인 장애보다는 오히려 영적이고 관념적인 장애와 관련이 있다. 즉,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8:18).
“조용히 해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의 음성에 더러운 영이 ‘그’에게서 떠납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놀랐고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시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예수의 음성, 예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태초의 그 “말씀”입니다. 더러운 영도 그 “말씀”에 굴복합니다.
우리의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 시대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의 이야기가 시작된 이유는 바로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가 회당 안에서 가르치실 때에, 그 때 마침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가 요동칩니다. 그들이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그가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더러운 영’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디든 요동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예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음을 생각해 봅니다.
권위(權威, 영어: Authority)라는 말은 국가(정부, 판사, 경찰 등)에 의해서 혹은 어떤 분야(어떤 주제에 관한 권위자)의 학문적 지식이나 명성에 의해서 힘이 행사되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권위는 제도, 이념, 인격, 지위 등이 그 가치의 우위성을 공인시키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을 뜻합니다. 국제협정에서 협정을 집행하는 제도를 만들 때 권위를 의미하는 오소리티(authority)가 사용되지만, 이 경우에는 권능이라고 번역합니다.
막스 베버는 3 가지의 권위를 주장하는데, 카리스마 있는 권위(성격, 영웅주의, 리더십, 종교), 전통적 권위(권위주의, 가업주의, 봉건주의), 법적 권한(현대 법과 주, 관료제)입니다.
권위에 대한 문헌은 로마사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고대 로마 사회에서 한 사람이 지닌 권위의 종합적 수준을 나타내며, 이에 따라 의견에 대한 지지를 집결시킬 수 있는 영향력, 명망, 능력 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욱토리타스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영적인 부분을 담고 있으며 로마의 영웅적 인물들의 신비로운 통솔력을 상징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한번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그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1:22)
올해 우리 모두가 ‘권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찬양 _ 찬송가 434장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