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50번 시편116편

(인도자)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회중)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인도자)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회중)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인도자)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회중)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렸을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인도자)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회중)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1-8)
(인도자)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회중)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인도자)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회중)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12-15)

송영 _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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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말씀 _ 마가복음 2장 23절 ~ 3장 6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 밭 사이의 “길”(hodos, 마가2;23)을 걸어가는 예수의 제자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논쟁 :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해설할 때 마가복음 2:23-3:6을 해석할 때, 두 가지 함정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는 1세기 유대교에서의 안식일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안식일은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에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규범 역할을 하였습니다. 창조 설화(창세기 2:1-3)와 십계명(출애굽기 20:8-11, 신명기 5:12-15)에 근거를 둔 안식일 준수는 신약 시대의 유대와 이방 문헌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금요일 해가 질 때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 유대인들은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느헤미야 8:9-12, 사 58:13-14), 여호와를 예배하며(사 66:23, 에스겔 46:3), 일상적인 일을 내려놓고(아모스 8:5), 자기 목숨을 방어할 경우에만 전쟁을 할 수 있다고 서로에게 권면했습니다(마카베오 상 2:29-41).

아래의 인용은 마카베오 상 2장 29-41절의 내용입니다. 안식일 준수가 어떻게 실제적으로 적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29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0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아들과 아내, 그리고 가축까지 그렇게 하였다. 불행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31  왕명을 거역한 이들이 광야의 피신처로 내려갔다는 보고가 예루살렘의 다윗 성에 있던 임금의 신하들과 군사들에게 들어갔다. 32  그래서 큰 군대가 그들 뒤를 쫓아 나섰다. 그들을 따라잡은 그 군대는 맞은쪽에 진을 치고 안식일에 그들을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33  그러고는 그들에게 "자, 이제 그만 나와서 임금님 말씀대로 하여라. 그래야 살 수 있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그들은 "우리는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임금의 말대로 하여 안식일을 어럽히지도 않겠다." 하고 대답하였다.35  그러자 곧 그들에게 공격이 퍼부어졌다. 36  그러나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도 않고 자기들의 피신처를 봉쇄하지도 않고, 37  "우리는 모두 깨끗한 채로 죽겠다. 너희가 우리를 부당하게 죽였다는 것을 하늘과 땅이 증언해 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38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 갔다. 죽은 이는 천 명이나 되었다. 39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며, 40  서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형제들이 한 것처럼 한다면, 우리가 모두 목숨과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이민족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이제 곧 그들은 이 땅에서 우리를 몰살시킬 것이다." 41  그날에 그들은 이렇게 결의하였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에게 휴식을 제공하여 지속적이고 끝없는 수고에서 벗어나게 하고, 규칙적으로 계산된 휴식 체계를 사용해서 그들의 몸을 재충전하여, 새로운 힘을 가지고 다시 예전 활동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 있습니다”(Philo, Special Laws 2.60).

다른 함정은 마가복음 2:24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입니다(후에 3:6; 7:1, 3, 5; 8:11, 15; 10:2; 12:13에서 등장함).

바리새주의는 1세기 유대교 내의 평신도 개혁 운동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토라를 최고 수준으로 준수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생활 방식과 담론 모두에서 최고의 이상을 실천함으로서” 동시대 유대인들의 찬사를 받았었습니다(Antiquities 12.15 [circa A.D. 105]). 그들은 성경을 신봉하는 정직하고 독실한 공동체의 기둥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마가복음 2:23-3:6에서 제기된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음과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7-28).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3:4a).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너무도 당연한 대답 그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치유를 요구하지도  않은 손 마른 사람에게 명령하여 그 사람의 몸을 온전하게 회복시킵니다. 그 주제가 배고픔이든 치유이든, 인간의 욕구 충족(2:25)은 경건한 종교성보다 매번 우선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불가피하게 많은 이들과 논쟁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더욱 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예수는 그저 말하고 행동하시며, 그 다음에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결론을 내리도록 이끄십니다(2:4-5, 10-12, 13-14, 27-28, 3:1-6). 예수는 신실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이번 주일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평생 동안 갖고 있는 생각들이 도전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음”(1:14)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2:12). 이 신비롭고 분노에 찬 설교자의 말에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우리의 심판자이자 희망으로 선포합니다."

이 회당 장면은 예수의 권위, 예수의 가치, 그의 주장들의 긴급성에 관한 갈등이 더 깊어지게 합니다. 숨어서 기다리며 주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중요한 점은 예수가 그 사람의 손을 고칠 능력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안식일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 즉 삶에 선한 질서를 부여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거룩함을 만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고 믿었던 율법을 고의로 무시하는 것을 보여주느냐의 여부였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의 질문은 바리새인들의 의심의 전제에 동의하지 않으셨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는 이 사람을 치유하심으로써 어떤 형태로든 율법을 가볍게 보거나 위반하는 것은 아닙니다(예수께서 여기에서 행하는 어떤 것도 안식일이 금지하는 “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마가는 안식일 계명의 목적을 존중하는 예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마치, 율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넓게는 생명을 구하고 보존하는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참조, 신명기 30:19-20). 그러므로 사람의 마른 손을 회복시키는데, 사람의 안녕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시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식일보다 더 좋은 날이 어디에 있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예수의 동시대 유대인들은 예수의 기본적인 생각을 특별히 문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대 랍비 전통에 따르면,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안식일보다 우선합니다.”

틀림없는 것은 그 사람이 죽어가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말라있었다는 점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무런 논쟁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손이 마른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회당에서 그 사람은 손의 회복을 통해 아마도 갈릴리 경제를 위해 일하는 그의 능력을 또한 돌려받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능력을 받음으로서 가족을 부양할 능력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기적을 단순히 그 사람의 “잘못된” 것을 “고치는” 행위로만 보는 능력주의적 시각을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온전함과 존엄성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은 생명과 인간의 번영을 증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의 전조들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부활의 전조들은 안식일의 기쁨과 자유를 삶의 모든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처럼 예수는 생명을 보존하는데 전념하십니다. 그분의 사역은 두려움, 제국의 가식, 종교적 위선의 억압적이고 부패한 폭정이 있다면 어디서든지 그것들을 폭로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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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