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1장 다 찬양하여라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52번 시편 119편

(인도자)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회중)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인도자)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회중)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9-12)
(인도자)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ㅇ든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회중)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15-16)
(인도자)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회중)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대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인도자)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회중) 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
(인도자)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회중)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2-97)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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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228장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

말씀 _ 마가복음 9장 2~8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리고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마가복음 9장 2절의 말씀이 또한 오늘의 이야기 전부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제목으로 “예수님의 산상변화”, 또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다.’ 등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 사건이 어떤 일 엿새 후에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9장 28절은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엿새 후, 어떤 사건, 그러니까 매우 중요한 사건이 있은 후 ‘6일’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엿새 전의 사건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8장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의 첫 번째 “수난예고”(마가복음 8:27ff)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베드로의 고백과 이어지는 예수님, 그 자신의 고난에 관한 예고 사건 이후 6일이 지난 것입니다.

마가는 왜 우리에게 “엿새”라고 전하는 것일까요? 그는 출애굽기 24장15-16절의 모세와 산과 연관을 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 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이는 마가복음의 위치가 구약과 신약의 연결이라는 관점에서 마가의 의도를 알수 있게 됩니다. 누구복음 9장의 “8일쯤”이라는 기록과 비교해 보면 마가는 분명, 구약의 모세와 하나님, 그리고 그 ‘산’에서의 사건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사건이 그저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것은 극히 드문 것 같습니다.  엿새 후, 그 몇일 그리고 오래 전 그 ‘사건’과 오늘의 ‘사건’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의미’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속성’이 아닐까요?

저와 여러분의 삶의 많은 순간 또는 사건에서 이 ‘의미’를 발견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의 이야기는 2절의 말씀이 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신약성서의 유일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마태,마가,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된 말씀입니다.

여기서 신학자들은 아주 단순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 변모/변형의 이유가 무엇인가?” “변모가 어떤 목적(들)에 사용되는가?”

마가복음의 맥락에서 가능한 대답 10 가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가지 목적은 이것이 9장1절에서 말하는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세 제자들은 예수의 변모와 함께 하나님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본다.
한 절 더 앞으로 가면 예수는 이렇게 말하셨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8:38). 이 말씀도 또한 변모를 가리키는 것인가? 영광으로 임하는 것, 권능으로 임하는 것, 그리고 변모 이 세 가지 모두가 부활보다는 재림을 보여주는 것인가? 나는 변모가 예수가 아버지의 영광과 그 나라의 권능을 갖고 계신 분임을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속에서 부분적으로 경험되어지는 반면에 우리는 그것의 온전한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 예수를 율법과 선지자들과 연관 짓고(그리고 대조하기) 위해

또 하나의 목적은 예수가 산위에서 모세와 엘리아가 대표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의 성취임을 암시하는 데 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보지만, 그 내용에 관해서는 듣지 못한다. 나는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와 대화하는 사람들이 모세와 엘리야인지를 알았는지 궁금하다. 회당에 걸려있는 두 사람의 사진을 보았을까? 흰 색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의 옷의 주머니 위에, 그들의 등 뒤에, 미식축구선수들처럼 그들의 어깨 위에 있는 이름표를 보았을까? 제자들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았는가는 본문이 대답하는 질문들이 아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고 있고 있었다. 게다가 그 두 사람 모두 죽음을 겪지 않았다는 전승들이 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갔다(열왕기하 2:1-11). 모세의 매장지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신명기 34:5-8)은 하나님이 모세를 하늘로 데려가셨다는 견해로 발전했다. Origin(c.185-c.254)은 유다서 9장에 나오는 모세의 시신에 관한 대천사장과 악마사이의 논쟁은 “모세의 승천”이라는 제목이 붙은 소논문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모세가 죽지 않았다는 전승도 있었다.
이 사건은 또한 예수를 “선지자들”과 구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한다고 말했었다(8:28). 변모가 끝날 무렵에, 거기에는 예수만 계신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예수이다.

(3)예수가 선지자들이 기다리는 분이심을 암시하기 위해

James Edwards(The Gospel according to Mark)는 위의 “율법과 선지자들” 해석과 대조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대 교회의 믿음체계에 따르면, 모세와 엘리야는 변모설화에서 예수를 기다리는 예언자적 전승의 대표자들로 등장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모든 선지자들이 [예수]에 대해 증언한다”(사도행전10:43).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 모두 율법과 선지자들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모세가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가 선지자를 대표한다고 상세하게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7절을 읽을 때 떠올리게 되는 구절인 신명기 18장15,18절에 따르면, 모세는 종말론적인 선지자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모세는 유다사상에서 예언자적 전승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주 간주된다. 또한 엘리야 역시  시내산과 연관이 있다(열왕기상 19:1-9). 모세와는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엘리야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NIV가 4절에서 “엘리야와 모세”를 동등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엘리야가 모세보다 아랫사람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등장하는 구절은 한 곳 뿐이다. 말라기 4:4-6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히, torah)를 기억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후속 구절에서 엘리야는 여호와의 날에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로 향하게 하는 선지자로서 소개된다. 변모 설화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이 구절과, 오실 마지막 예언자를 함께 준비하는 자들로서의 그들의 예언자적 역할을 떠올리게 한다(신명기 18:15, 18과 말라기 4:5-6). 예수를 위한 그들의 공동 준비는 “예수와 대화를 하는” 그들에 대한 마가의 묘사를 통해 한 번 더 확인된다. 그들은 청중 앞에서 윗사람인 예수와 함께 있다. [p. 265]

(4)낙담의 시기에 예수를 “산 경험”과 연관시키게 하고자

Ched Myers(Binding the Strong Man)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에 관해 설명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두 위대한 선지자들은 이 순간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사는 그들의 삶에서 중대한 낙담의 시기에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현현을 본 사람들을 대표한다. 엘리야의 기사에서 환난에 직면한 이 위대한 선지자는 당국자들에 의해 쫓기는 사람이 된다. 그는 도망가고자 하지만, 여호와를 만나고, 여호와는 그를 다시 투쟁 속으로 돌려보내신다(열왕기상 19:11ff). 그리고 모세의 경우 여호와의 사절로서 그의 메시지가 사람들에게서 한 번 거절을 당했으므로, 다시 산에 올라가야만 했다(출애굽기 33:18ff). 두 이야기 모두 마가의 설화의 이 시점에서 도움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p. 250]

(5) 예수가 신적인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해

눈부신 흰 옷은 (예수가) 지상적인 존재보다는 천상의 존재임을 암시한다(다니엘서 7:9;12:3;마가복음 16:5;마태복음 28:3).

(6) 예수의 다가올 순교를 나타낸다.

Myers(Binding the Strong Man,)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계시록 3:5,18;4;4;6:11;7:9,13에서처럼) 묵시문학적 본문들에서 흰 의복들은 순교자의 옷을 상징하게 되었다.… 우리는 십자가(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가르침 직후에 발생한 변모사건에서 예수의 새 옷은 순교자의 흰 옷을 상징한다고 결론짓게 된다.” [p. 350].

(7) 제자들의 보지 못함의 또 하나의 암시(증거).

제자들은 다시 한 번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한다. 그들이 여기 있는 것이 왜 좋은가?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것이 왜 왜 좋은가? 그들은 단지 모든 영광 중에 있는 예수를 보고, 초막으로 그 사건을 보존하기 위해서 온 것인가?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다른 제자들이 악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함으로 인해서 서기관들과 논쟁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는 것에 주목하라. 후자의 사건은 산 정상에서 경험한 영광보다 회중들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잘 보여준다. 예수는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말씀하신다(9:19). 우리가 1세기의 무리들보다 더 많이 진보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역의 장소는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있는 산 아래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한다. 그가 짓겠다고 계획한 초막(skene)은 무엇인가? 이 단어는 “장막” 또는 “임시 거처”를 뜻할 수 있다. 이것은 예배 장소로서의 “장막”을 뜻할 수가 있다(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거처). 이것은 집, 곧 영구적인 처소를 뜻할 수가 있다. 왜 이 세 사람은 집을 필요로 했을까? 아마도 그는 그 사건이 영원히 지속하도록 그 사건을 “보관할 집을 짓기를” 원했을 것이다. 한 성직자 친구는 베드로가 "건물 콤플렉스"가 있다고 진단했다.
마가는 베드로에 대해 다음 비판을 포함시킨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9:6) 마태는 이 말을 생략하고, (누가는 “그들이 두려워하므로”를 생략한다.) 우리가 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할 때들이 있다.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들이 있다. 이런 결격사유를 지닌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베드로는 우리가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증명한다.
우리가 예수님, 모세, 엘리야와 함께 산에 있었다면 베드로보다 더 훌륭하게 행동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우리가 산에서 내려와 흙먼지와 오물, 악령이 가득한 곳에서 살기보다는 영광의 산 위에 거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우리가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 살기보다는 신성한 빛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어리석은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을 것이다.

(8) 제자들과 (독자들은 다시) 예수에 관한 하나님의 선언을 지금 듣는다.

세례에서 예수(와 독자들)만이 예수가 “내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음성을 듣는다. 지금은 세 제자들도 이 관계를 증언하는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하지만 이 지식이 동산에서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기도하는 대신 잠이 든다(14:37-41). 따르기보다는 도망간다(14:50). 하나님으로부터 증언을 듣는 것이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지속적이고 깊은 신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9) 하나님의 새로운 명령을 듣게 하려고

그 음성이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한다. “들으라”(akouete)는 현재 명령법으로, 지속적인 행동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것은  “계속해서 그의 말을 들으라” 또는 “그의 말을 듣는 것을 계속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십계명을 주셨다. 신약에서 우리는 이 한 계명을 받는다.
Edwards(The Gospel of Mark)는 이 명령이 모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게 한다고 설명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명기 18:15). [p. 268]
“들으라”는 이 명령은 많은 설교를 위한 충분한 가능성들을 담고 있다. 로마서 10장 17절과 연결하여 우리는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들음을 통해 온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 (이 사건에 대해) 말할 때

오늘의 본문의 마지막 목적은 이 사건에 대해 말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이 고쳐준 사람들에게 자주 침묵명령을 하신다( 1:25, 34, 43; 3:12; 5:43; 7:36; 8:26, 30.)  그러나 9장9절의 침묵명령은 인자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날 때까지이다. 그 이후에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변화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마가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가 바로 제자들의 보지 못함(또는 어리석음)과 다른 편으로 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신실함입니다.

예수께서 수난에 관해 말할 때 베드로는 예수를 책망합니다. 베드로는 이런 말을 듣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말하신 것처럼, 베드로의 문제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8:33). 동일한 문제가 초막 셋을 짓고자 하는 그의 소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것은 베드로가 예수의 책망을 받기 직전에 “주는 그리스도 이십니다”(8:29)라는 훌륭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누구인가에 관한 이 지식은 예수가 무슨 일을 하실 지에 대해, 즉, 고난당하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를 돕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베드로가 “자기 뒤에 있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그들은 변모에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영광을 입으신 아들을 봅니다. 그러나 이 계시는 베드로(또는 제자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초막을 세우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듣기를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33장 17-23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고 말하셨고 대신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틈에 숨으면,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 손으로 모세를 덮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거둘 때,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지만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모하신 예수는 두려움이 생겨나게 했고(9장6절에서 사용된 단어인 ekphobos는 phobos의 강조형입니다.)

제자들은 영광을 입으신 예수에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9절에서 우리는 제자들과 이야기를 관계를 맺고 대화를 이어가는 “평범한” 예수를 다시 보게 됩니다.

몇 주간의 기적적인 치유가 있은 후, 우리는 Myers (Binding the Strong Man)가 치유와 관련하여 내린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마가복음에서 제자도를 향한 진정한 장애는 육체적인 장애가 아니라 영적, 사상적 장애와 관련이 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겠느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겠느냐?(8:18)” [p. 149].

우리의 믿음은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보는 것, 듣는 것, 기억하는 것이 믿음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믿음”이 보는 것, 듣는 것, 기억하는 것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사건’은 엿새 전, 그 몇일 전과 또 오래전 그 ‘사건’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거기서 우리는 ‘은총’을 발견하게 되고 이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줄 것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가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은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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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2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