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46번 시편 104편

(인도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회중)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인도자)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회중)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인도자)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회중)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1-5)
(인도자)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회중)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인도자)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회중)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인도자)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회중)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인도자)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회중)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9-13)

송영 _ 찬송가 4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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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말씀 _ 마가복음 9장 30~37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세 번의 수난 예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그들은 인자를 죽일 것이며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말씀하셨는지는 알 수 없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말 못하는 영에 사로잡힌 어린아이를 고치셨고 이 놀라운 일로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을 피해 가버나움으로 가시는 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시는 길에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을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고 예수님께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고 32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서로 논쟁을 벌인 것 같습니다. 가버나움에 도착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을 벌였느냐?”

그러나 제자들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누가 가장 크냐?”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가르치기 위해 앉으셨습니다(35절). 그것은 가르침을 위한 공식적인 자세였지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현재시제=“계속해서 원하는 것.” “계속적으로 바라는 것”)이라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기를 바라는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위한 방법들을 설명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첫째가 되는 것을 바라는 제자들을 비난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욕구” 그 자체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마다의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말째가 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35절과 37절 말씀을 연관지어 살펴보면 “모든 사람의 끝”과 “어린아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의 끝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어린아이”라는 것을 깨닫을 수 있습니다.

Perkins (Mark, The New Interpreters Bible)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에 어린아이는 인격체가 아니었다(비교, 갈 4:1-2). 어린아이들은 여자들과 함께 있어야 하고, 교사와 그의 학생들 주위에 있지 못했다(비교 10:13-16).

아이를 뜻하는 단어는 파이디온(paidion)입니다. 이 단어는 사춘기 이전의 아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나이나 성별은 명시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9장 14-29절에서 제자들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그들이 아이에게 시간과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Malina & Rohrbaugh, (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는 어린아이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아이들은 무고하고 신뢰할 만하며 상상력 넘치고 매우 유쾌해하는 존재로, 온화한 예수의 무릎에서 노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고대에 아이들의 삶은 공포로 가득한 시기였다. 유아사망률은 때로 30%애 도달하였다. 신생아들의 또 다른 30%는 여섯 살 쯤에 사망했고, 60%는 약 열 여섯 살 쯤에 사망했다. 어린아이들은 기근, 전쟁, 질병, 탈골로 늘 가장먼저 고통을 겪었다. 어떤 지역이나 시대에서는 생존한 부모들과 함께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있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고아는 사회의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일원이었다. 그러므로 유아기는 공포의 시기였고,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는 것은 축하할 일이었다. 고대에 젊음을 찬양하고 노년을 미화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이들은 가족 공동체에서 거의 지위가 없었다. 미성년 아이는 노예와 마찬가지였고, 성년에 도달한 후에 비로소 자유인이 되어 가족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또한 “아이/아이들”이란 용어는 또한 심각한 모욕의 뜻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참고, 마태복음 11:16-17).
그렇다고 아이들이 사랑받지 못하고, 소중히 여김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계승을 보증하는 일 말고도, 노년의 부모들에게 아이들은 안전과 보호를 약속하였다. 가족에서 여자의 위치는 자녀들, 특히 남성 자녀들에 의존하였다. 더욱이 여자들에게 자녀들은 (아버지의 가족에서 그녀의 형제자매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정서적 후원자들 가운데 하나였다.[p. 238]

Juel (Mark, Augsburg Commentary)은 어린아이들에 대한 이미지를 좀 더 확장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문화에서 아이들은 지위가 없었다. 그들은 부모들의 권위를 따라야만 했고, 재산보다 조금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서 아무도 상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위가 제공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 중요하지 않은 사회의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삶의 주요한 측면인 환대를 가장 부적절해보이는 사람들에게 확대함으로써 전통적인 지위 관념에 도전하고 있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환대는 예수 자신의 사역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표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거부와 죽음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신 분에 대한 충성과 많은 관련이 있다. [pp. 133-4]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는 어린아이 하나를 안으신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립니다.

아이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겸손의 본보기로서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영접해야만 하는 “작고” 하찮은 사람들의 본보기로 사용된다. … 그러므로 제자들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되고, 아이들을 포옹하는 예수처럼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뭇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예수이시다. 예수께서 만국의 비유(최후의 심판의 비유)에서 매우 강력하게 묘사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시는 것은 작고 힘없는 자들 안에서이다(마태복음 25:31-46)(p.288).

오늘날 세상에서 “작고 하찮은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교회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마가복음 10장 15절에서 “어린 아이”와 “환영하다”(welcome)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not welcome)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절).

예수님은 1세기에 재산으로 여겨지거나 아마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이들인, 어린아이를 통해 제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의 [야이로의 딸], 마가복음 7장의 [여자의 딸], 마가복음 9장의 [말하거나 듣지 못하는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을 기억해 보십시오!

본질적으로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어린아이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와 존중으로 대하는 것,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곁에 있는 제자들의 "누가 가장 크냐?"는 논쟁을 벗어나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새 왕국, 새 질서, 새 존재 방식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중심에 두고, 어린이를 축복하고, 어린이를 자신에게로 부르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0:1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돌려받을 기대를 하지 않고) 연약한 자를 영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자기이익이나 숨겨진 어떤 목적이 없이 사랑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회적 행동은 우리가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하는가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깨닫고 받아들이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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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500장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