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105번 감사절(1)
(인도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회중)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07:1)
(인도자)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회중)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시105:1)
(인도자)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회중)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인도자)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회중)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인도자)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회중)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4-9)
송영 _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410장 내 맘에 한 노래있어
말씀 _ 마태복음 10장 40~42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추수할 것(마태복음 9:35-10:8)을 위해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이 경험하게 될 일에 대해 가르치는 긴 단락의 끝부분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기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보다는 그들이 가게 될 공동체, 또는 그들이 만나게 될 사람들이 들을 필요가 있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이 문장은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으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라고 제자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0장 1절을 통해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께로의 ‘초대’가 이루어집니다.
그 초대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되며, 치유, 고침, 회복을 경험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며, 또한 우리를 통해 ‘초대’받은 이들 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다”(dechomai) 는 “환영하다”라는 의미와 함께 쓰이는 단어입니다.
영접하는/환영하는 단어는 10장 14절에서도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거나(영접) 너희의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에 너희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Malina 와 Rohrbaugh (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는 10장14절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영접하는” 것은 환대를 베푼다는 뜻이다. 환대는 낮선 사람이 일정시간 동안 호스트(후원자)의 보호아래 있다가, 그 후에 친구나 적으로서 그 보호에서 떠나는 과정이다. [p. 87]
긍정적인 결과들은 환대를 베푼 사람으로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친척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보답받게 한다. 고대 지중해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친족관계망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고대 지중해 사회는 개인에 대해 소위 “이중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특히 가족)과 얽혀 있고, 그 사람/그 여자의 정체성은 그 사람/그 여자가 속한 단체로부터 도출되었다. 따라서 가족이나 출생지나 직업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데 필요한 정보를 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정형화할 수 있었다(참조,막 6:3; 14:70; 요 1:46; 7:52; 딛 1:13). 또한 정체성, 성품, 행동방식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사로 연관된 관계망에 형성된다고 추정했다. 정확하게 이런 종류의 이중적 관계가 여기에서 추정되고 있다. [p. 92]
이와 같은 의미를 마태복음 18장5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37절,누가복음9장48절)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dechomai] 곧 나를 영접하는[dechomai] 것이니
정리해보면 오늘본문은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
2. “영접을 하는 사람들” 곧 예수께서 파송하신 제자들, 선교자들을 영접하는 것
초대 교회에서는 누군가가 편지(또는 메시지)를 보내오면, 그 편지를 가져온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듯이, 집 관리인이 개인적인 용무로 보낸 사람을 [그가] 집 관리인 것처럼 영접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전해진 “디다케”가 있습니다.
작자는 미상으로 신약 외경(外經)에 속하는 책입니다. 정식 제목은 《12사도를 통하여 이방인에게 준 주(主)의 교훈》이며, 일반적으로 《12사도의 교훈》으로 통용되는데 ‘디다케’란 ‘교훈’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문서는 100~150년경에 교회 규율의 지도서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1875년 그리스 정교회의 주교 필로데우스 브리에니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 도서실에서 그리스어 필사본 문서를 발견, 고대 교회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모두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1~6장이 ‘생명의 길’과 ‘죽음을 길’로 된 도덕률, 7~10장은 세례성찬 등 전례에 관한 규정, 11~13장은 예언 ·복음 등의 수용 자세, 14~16장은 종말론적인 경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온 단어로는 '케리그마'(선포)와 '디다케'(교육), ‘디아코니아’(봉사), ‘코이노니아’(교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교육을 ‘디다케’로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교육’을 넘어 디다케는 여기서 예수가 묘사하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방법, 사도들이나 순례 교사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영접하고 대하는 방법에 관한 공동체의 지침들입니다.
디다케의 모든 지침들은 다음과 같은 맨 처음 구절에서부터 생겨납니다.
“두 가지 길, 즉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는데, 그 두 길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생명의 길은 가장 큰 계명을 토대로 한다: “생명의 길은 첫째, 너를 지으신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며, 네가 남에게 해 주고 싶지 않은 것을 너도 남에게 해 주지 않는 것이니라”(디다케 1장2절).
생명의 길에는 다른 모든 것 중에서 관대함, 환대, 일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포함된다. 사망의 길은 다음과 같은 악한 일들로 그 특징이 묘사된다.
“또 사망의 길이 있으니 선한 것을 핍박하는 자들이요 즉 거짓을 사랑하며 의의 상급을 알지 못하며 선과 의로운 판단을 분별하지 않으며 선이 아니라 악을 바라보며 온유와 인내가 멀리 떨어져 있으며 헛된 것을 사랑하며 보상을 좇는 사람들이니라.
또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곤경에 처한 자를 위하여 수고하지 아니하며 그들을 지으신 이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 또한 어린이를 살인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며 곤경에 처한 자를 외면하고 곤경에 처한 자를 억압하며 가난한 자를 불의하게 재판하며 모든 일에 잘못을 행하는 자들이니라”(디다케 5장2절).
다시 말해, 사망에 이르는 멸망의 길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게으른 모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오는 선지자, 교사 또는 사도를 분별하는 열쇠는 그들이 하는 말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행동에 있다는 것입니다.
디다케는, 그들이 가르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서의 지침에 따라 그들을 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으로 영접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행동을 통해 스스로 거짓임을 증명한다면 그들을 떠나보내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오는 모든 사도를 주 하나님으로 영접하라. 그러나 그는 하루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필요하더라도 이틀 이상은 안 된다. 만약 그가 사흘 동안 머물러 있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하는 모든 사람이 선지자가 아니며, 오직 그가 주님의 방식들을 유지하는 사람만이 선지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방식들을 보고, 거짓 선지자와 선지자를 알 수 있다 … 진리를 가르치지만 가르치는 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신학자들은 이처럼 행동으로 나타나는 인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기독교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특히 중요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단계에서는 공식화된 교회기구나 합의된 정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예언자의 이름을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자기의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41~42절)
찬양 _ 찬송가 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
주기도 (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