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60번 시편 139편

(인도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회중)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인도자)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회중)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1-4)
(인도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회중)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고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도자)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회중)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7-10)
(인도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회중)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

송영 _ 찬송가 5장 이 천지간 만물들아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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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말씀 _ 마태복음 13:31-33, 44-52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섯 개의 다른 비유들로 구성되어 있고, 대부분이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겨자 씨 비유(마태 13:31-32//마가4:30-32//누가13:18-19)
누룩의 비유(마태 13:33//누가 13:20-21)
묻힌 보물의 비유(마태 13:34)
진주의 비유(마태 13:45-46)
그물의 비유(마태 13:47-50)
왕국 학자들(서기관)의 비유(마태 13:51-52)

마지막 두 절이 마태복음 13장 비유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의 보물들(13:51-52)

51절의 “서기관” 또는 “율법학자”, 여기서 이 단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23장 34절은 기독교 “서기관들”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기관들을 “학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학자”는 그들의 오만과 지식이 새로운 어떤 것을 배우지 못하게 막거나,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경시하게 할 때는 부정적인 용어가 될 수 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보물 상자에서 새 것과 옛 것을 가져올” 때 긍정적인 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새로운”을 뜻하는 두 개의 일반적인 단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6-17절에서 두 단어가 모두 사용되고 있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neos)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neos) 포도주는 (kainos)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로운”을 뜻하는 두 단어 모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떤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위의 구절에서 “새로운”(fresh) 부대는 만들어진지 조금 되었지만, 사용된 적이 없는 것이었기에 포도주와의 관계에서 새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비유가 “왕국”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라면, 왕국이 오래된 보물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죽은 전통, 역사적인 교훈, 시대에 뒤진 당연한 어떤 것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왕국이 새로운 보물이기만 하다면, 지나가는 유행이나 갑작스러운 열광, 깊이가 없는 어떤 것 이상이 될 수 없겠지요.

왕국의 보물은 세상을 창조할 때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처럼, 아브라함과 사라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처럼, 하나님께서 출애굽에서 그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사용하여 그의 백성을 바빌론에서 자유롭게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이 땅에 임재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도들과 마틴 루터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 안에서 행하신 것처럼 오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왕국의 보물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들을 듣는 것처럼 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다시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 삶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처럼 새로운 것입니다.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 속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처럼 새로운 것입니다.

Jaroslav Pelikan은 약간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둘 사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전통은 죽은 자의 살아 있는 신앙이고, 전통주의는 살아 있는 자의 죽은 신앙이다.” (The Christian Tradition, Vol. 1: The Emergence of the Catholic Tradition (100-600), page 9)

왕국은 앞서 산 사람들의 믿음을 살아있게 만드는 학자들이 필요해 보입니다.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옛 보물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학자들이 필요한 것이지요. 안타까운 것은 점점 우리 기독교 안에 이 “학자” “선생님”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국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새로운 상황의 관점에서 옛 것을 계속해서 해석하는 학자들이 절실한데도 말입니다.

겨자 씨 비유(13:31-32)

이 비유에서 학자는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오래된 이미지들을 결합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작은 어떤 것에 대한 전통적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17장20절에서 작은 믿음의 예시로 사용되었지요. 그리고 나무 가지에 둥지로 트는 새들의 그림은 오래된 이미지(그림)입니다.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에스겔 17:23)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에스겔 31:6)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다니엘 4:12;참조 4:21)

과학적으로 볼 때, 겨자씨는 결코 나무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큰 덤불이 될 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과학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루는 중입니다.

한 가지 해석은 비유가 매우 큰 나무의 오래된 이미지(상징), 일반적으로 레바논의 백향목을 풍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겨자 식물은 종종 팔레스타인에서 잡초로 간주되고, 커다란 백향목은 거기서 자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누룩의 비유(13:33)

Scott는 이 비유가 거룩하고 선한 곳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근거하여 왕국이 어디에서 활동하는 지를 예견하려는 손쉬운 시도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 이 비유는 왕국은 비록 부패의 모습일지라도 그 모습으로 나타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p. 329]

고대 세계에서 누룩이 도덕적 부패의 상징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인정되는 사실이다.…누룩의 물리적 특성은 누룩이 부패의 상징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누룩을 만들 때, 빵 한 조각을 가져다가 곰팡이가 생길 때까지 습하고 어두운 곳에 보관한다. 오늘날 가정에서 사용하는 효소와는 달리, 빵은 썩고 부패한다.… 이스라엘에서는, 누룩은 거룩하지 않은 일상이고, 누룩 없는 것(즉, 무교병)은 거룩한 것, 신성한 것, 축제의 떡이라는 등식이 있다. [p. 324]
일반적으로 청중은 누룩에 대한 언급이 부정적인 특성을 갖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처음에 충격과 놀람의 반응을 보인다. 어떻게 하나님나라가 누룩과 같을 수 있는가? 적절한 전통적인 은유는 누룩 없는 것이 확실한데? 이 은유는 유월절과 출애굽을 부정하는 것인가? 그래서 청중은 좌절하고 방향을 잃는다. [p. 325]

묻힌 보물의 비유(13:44)

이 이야기는 밭과 그곳의 보물을 소유하고 있는 한 남자에 대해서보다는 보물이 그 사람을 어떻게 사로잡고 소유했는지에 대해 더 많은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서 유일한 관심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보물을 손에 넣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Carter (Matthew and the Margins)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보물은 그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새롭고, 기쁨이 넘치고, 위험하고, 대가를 많이 치루는 것들을 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매우 귀중하다.  …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 이것은 그의 삶을 위기에 빠트리는 위험한 행동이지만, 그의 목숨조차도 버릴 가치 있는 일이다(참조, 10:37-39). 제국(하나님의 나라)은  다른 모든 우선순위를 제쳐두고 전심으로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4:18-22, 8:19-22, 9:9). 소유물이 하나님의 왕국을 대면하는 것을 막게 해서는 안 된다(6:19-34; 13:22).” [p. 295].

우리가 교회에서 너무 편안해져서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나라 때문에 새롭고 기쁨이 넘치고, 대가를 많이 치루는 일들을 하는 위험을 감수하려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천국은 우리가 소유하는 보물이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를 사로잡는 어떤 것입니다. 천국의 능력은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따르기 위해 죄인들과 세리들과 다른 부정하고 구원받지 못한 유형의 사람들과 교제하게 하고, 시간과 돈을 나누어주고, 물질주의와 소비주의를 포기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진주의 비유(13:45-46)

이 비유와 앞의 비유와의 차이점은 밭의 보물이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진주는 열심히 찾은 후에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가치 있는 것에 사로잡혔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요? 바라기는 이 “신비한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물의 비유(13:47-50)

그물은 그 안에 잡힌 것은 무엇이든지 끌어올립니다. 잡히느냐, 잡히지 않느냐는 물고기가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사실, 본문에는 “물고기”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것들”과 “좋은 것과 못된 것”이라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못된” 것들은 갓 잡은 고기에 대해 사용하기에 적합한 용어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 단어는 나쁘거나 썩은 열매에 대해 사용됩니다.(7:17, 18; 12:33)

“잡은 물고기”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동사는 synago로서 “회당”이란 단어의 어근입니다. 이것은 아마 밀과 가라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마지막 때에 분리가 약속된 사람들인 신자들을 함께 “모으는 것”에 더욱 의미가 있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것을 뒷받침하는 말씀이 49절입니다. “세상끝 날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서 의인들 가운데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그들을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얼마 동안 밀과 가라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세상에서, 우리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 삶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깨달아 옛것이나 새것 중 어느 한 쪽에만 집중하지 말고, 옛것과 새것을 모두 가져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엉뚱한 보물 상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더욱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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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