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50번 시편 116편

(인도자)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회중)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인도자)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회중)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인도자)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회중)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렸을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인도자)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회중)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1-8)
(인도자)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회중)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인도자)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회중)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12-15)

송영 _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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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말씀 _ 마태복음 14장 14~21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은 말씀에서 마태는 세례 요한의 죽음 직후로 이 기적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병행본문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6장32-44절과 누가복음 9:10b-17절에서 이 사건은 사도들이 “선교” 여행에서 돌아 온 직후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1-15절에서 이 사건은 연못에서의 치유와 예수의 긴 강론 다음에 나오게됩니다.

그런데 왜? 마태는 이렇게 말씀을 기록하였을까요?

13절에서 조금 전에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해 들으시는 예수”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은 예수로 하여금 광야로 물러가 따로 있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혼자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무리가 듣고 여러 마을에서 걸어 나와 그를 따라갔다.”

외딴 곳, 광야로 물러가시는 예수를 무리들은 따라 갑니다. 마태가 요한의 “죽음” 이야기 바로 옆에 배치한 것은 예수와 요한과 옛 선지자들 사이의 연관을 강조하려 한 것 일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떠난 후에,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는 그의 종의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남게 하였지요.(열왕기하 4:42-44)

오늘은 마태가 전하고자하는 이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만나게 될까요?

다섯 가지 접근법과 많은 전통적인 특징들

Boring (Matthew, The New Interpreters' Bible)은 이 기적에 관한 학자들의 네 가지 입장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1) 굶주린 자들을 먹이는 기적 사건이 예수의 생애에서 실제로 발생했다.(그리고 마태의 기사에 따르면 아픈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다).

(2) Albert Schweitzer의 성례전적 설명으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에게 상징적인 식사로 빵을 나누어주었다. 종말론적인 연회의 예표인 이 “배고픔의 축제”가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한 음식을 제공하는 기적의 연회로 발전했다.

(3a) H. E. G. Paulus의 이기심 없음에 대한 교훈. 즉, 예수의 그의 제자들은 그들이 가졌던 적은 음식을 함께 나누었고, 그것에 부끄러움을 느낀 다른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게 되면서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양이 되었다.

(3b) 위의  Schweitzer의 해석과 비슷한데, Ernst Renan은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잠시 사막으로 이끌고 가서 거기에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말한다. 그 사건이 후에 기적기사로 발전했다.

(4) 그리스도 사건 전체의 의미에 대한 상징적인 표상으로, 성만찬의 의미가 담겨 있고, 모든 사람을 위한 종말론적인 친교와 풍성을 묘사한다. 이 이야기는 예수의 생애의 어떤 특정 사건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pp. 325-326]

Boring은 또한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이전의 전승을 거쳐 마가의 기사에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이 강력한 이야기는  기독론적인 신앙의 여러 차원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복음서에 6회 등장한다). 이 이야기에는 성경, 유대 전통, 기독교 전통의 다양한 특징들이 통합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광야 무대. 포로상태에서부터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출애굽기 13:18, 그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광야”가 92회 등장한다고 지적한다).
광야에서 식량이 공급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반항적인 [또는 현실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제자들(출 16:2-3=막 6:35-38)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민수기 27:17=마가복음 6:34)
군대처럼 배치된 백성들(출애굽기 13:18=마가복음 6:40)
시편 23편과 “푸른 초장”을 생각나게 하는 목자와 같으신 하나님(시편24:3=마가복음6:39)
만나의 제공(출애굽기 16장;민수기 11장;특히 요한복음[6:1-59]에서는 특히 이것을 발전시킴]
엘리사의 기적적인 식량 공급(열왕기하 4:42-44). 이 기적은 엘리야(복음서 기사에서는 요한)의 죽음 이후에 일어났다. 엘리사는 반대를 극복하고 많은 양을 남겼다. 복음서 기사와 매우 비슷하다.
먹기를 탐하는 사람이라고 비난받은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식탁친교를 제공하셨다.
예수의 그의 제자들과의 성만찬적인 마지막 식사(마가복음 14:17-25=마태복음 26:20-29). 거기에서 예수는 새로운 가정의 가장이 되셔서, 음식을  제공하고 식탁의 축복을 선포한다.
종말론적인 이미지의 하나로서의 메시야 연회로서, 빵뿐만 아니라 물고기와 바다 생물까지 포함되게 될 것이다(비교, 제2바룩 29:3-8;제4에스라 6:52;비교, 시편 74:15와 이사야 27:1)[pp. 323-324]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시작 행동들 사이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14:14)
마가복음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6:34)

만약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을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왜 가르침을 치유로 바꾸었을까요?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두 가지를 다 하십니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누가복음 9:11).

아마도 마태복음은 생명을 파괴하는 헤롯과 생명을 회복시키는 예수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는 헤롯과,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예수를 대조하려 한 것입니다.

“만약 병자들에게 치유가 필요하고,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이 필요하다면, 제자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필요를 돌보는 것, 기도에 대한 응답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5절에서 제자들은 예수께 위와 같이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간청은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Boring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마을 시장들이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 할 것이라고 추정한다(또는 희망한다). 예수의 가르침(6:25-34)과 대조적으로, 그들은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하나님보다 제국의 경제를 먼저 바라본다. [p.306]

우리의 기도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계획)에 맡기기보다 우리의 계획을 축복해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지요?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6절).

여기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점이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이”라고 말하고 예수는 “너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병든 자를 보실 때 치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지한 자를 보실 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굶주린 자를 보실 때, 음식을 공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일’하라고 도전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어떤 것을 하라.” (또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너희가 “굶주린 자를 먹이라.”)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5,000명에게 음식을 주고, 그 다음에 남은 것을 치우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일이 될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12제자들과 마지막에 거둔 열 두 바구니의 음식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의 요청대로 “사람들을 보냈다면” 제자들은 훨씬 더 쉬웠을 것입니다. 예수는 22절에서 그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제자들의 요철대로 마을로 가는 것이 훨씬 더 쉬웠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많은 수고가 동반되지 않아도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다른 방법들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는 기적적으로 사람들의 굶주린 고통이 사라지게 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지금, 마태는 제자가 되는 것이 단순히 배우는 것 이상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일꾼이 된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이 본문은 또한 제자들이 그들의 처분대로 할 수 있는 빈약한 자원(남은 떡)을 관리하는 청지기들이 될 필요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 제자들은 많은 일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무리들과 제자들 사이의 차이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적의 수혜자들인 반면에, 제자들은 그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것과 남은 것을 깨끗하게 정리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열 두 제자 한 사람이 바구니 하나씩을 채워야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Boring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명령은 변함이 없다. 먹을 양식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지만, 그것을 나눠주는 것은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일, 즉 사람의 수고의 ‘떡’을 존중하고, 사용하며, 칭송하신다.” [p. 326]

우리는 무리가 되길 바라고 있나요? 제가가 되길 바라고 있나요?

제자가 되길 기도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너희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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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3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