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72번 이사야 58장
(인도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회중)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인도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회중)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인도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 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회중)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인도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회중)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인도자)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회중)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인도자)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회중)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다같이)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6-11)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말씀 _ 마태복음 15장 21-28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마태복음 15장 1-28절은 의식적인 정결, 즉 누가 정결하고 부정한 사람이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르토스(artos)라는 단어, 즉 “떡”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예수와 가나안 여자와의 대화에서(26절), 앞의 기사에서(14:17,19), 오늘 본문 이후(15:33,34,36)에서 핵심 이미지이지요.
21~28절의 한 여인이 등장하는 이 사건은 예수께서 15:10-20에서 말씀하신 것의 한 사례입니다. 사람을 “더럽게”(koinos =“평범하게”) 만드는 것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인의 믿음은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녀의 경건함이나 거룩함은 외적으로 과시하는 것들이 하나도 없지요.
10-11절은 무리들을 향해 한 말씀이고, 12-20절은 제자들을 향해 한 말씀입니다. [10-14절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위한 설명이고, 15-20절은 베드로를 위한 설명이라고 보는 또 다른 개요도 있습니다.]
어떤 개요를 사용하든, 이 단락의 대부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그것은 아웃사이더들보다는 “인사이더들”에게 문제가 더 많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또는 마태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정죄하는 기준으로 의식적 바름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태 공동체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성장하고 있었고(13:24-30), “양과 염소”가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25:31-46). 이것은 우리가 그 둘의 차이를 말할 수 없다는 경고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 단락에서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반대자들에 대해, 이를테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고, 그들은 인간의 전통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식의 단순한 비난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한다고 비난하는 일은 매우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보다 부모를 더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셨고(10:37) 장차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8:21-22)
진정 문제가 무엇일까요? 28절 예수님의 대답에 있습니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다.”
계명을 지키고 안 지키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큰 믿음을 만드는가?
예수는 28절에서 가나안 여자가 “큰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셨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믿음을 묘사할 때 이 형용사의 유일한 용례이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예수는 큰 믿음을 가졌다고 말씀하셨지만 이 여인은 지난 주일의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지 않았으며 산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마 생전에 교회에 가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성경을 읽지 않았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녀의 믿음을 크게 만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이 여자에 관한 몇 가지 배경
그녀는 두로와 시돈 출신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접경지역 가까이 있는 페니키아 도시들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페니키아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그 지역 출신이라고 진술함으로써 그녀가 도시 거주자보다는 시골 농부였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녀는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수로보니게 사람이다.). 가나안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본 함의 아들이었다. 노아는 창세기 9:25-27에서 다음과 같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유대인들의 종이 될 것이라는 고대의 이 저주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세기 17:8).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족속들의 하나였습니다(신명기20:17).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땅과 도시들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가 그 명령을 부분적으로 수행하였지요.
이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가나안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유대인의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우호적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왜 예수께 다가왔을까요?
한 가지 의견은 그녀가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필시 그녀는 예수의 치유 기적들에 관해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필요는 너무나 컸을 것입니다. 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매우 컸기에, 유대인과 가나안인 사이의 갈라진 간격을 용감하게 뛰어넘을 수 있었겠지요. 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고, 어쩌면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질 때의 외침과 상황이 비슷한 것 같아보입니다.
Douglas Hare (Matthew, Interpretation Commentaries)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멸시받거나 억압받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대담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 여자는 자신의 딸이 정상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아 마땅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상황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그녀의 인내가 보상을 받는다. [p. 179]
이 장의 앞부분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방법을 찾는 바리새인들과, 딸을 위해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 이방 여자의 대조가 가능하기도 합니다. 누가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하는 것으로 보이시나요?
Hare는 또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스웨덴의 신약학자의 주장처럼 우리는 단지 ‘명예로운 유대인들’ 일 뿐이다”[p. 179]. 우리 대부분은 우리 조상이 “이스라엘 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지 않는다(즉 우리를 “잃어버리거나” “방목하는” 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개” 범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둘 다에서 “개”라는 용어는 경멸의 칭호이다. 이 용어가 사람에게 사용되거나, 이 용어에 “∼의 아들”이 추가되면 매우 경멸적인 용어가 된다.
예수에게는 소명이 있습니다. 그의 소명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향한 것입니다. 그는 이 이방 여자 때문에 그 소명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는 “∼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셨습니다(26절).
“마땅하다”(kalos)는 단어는 “도덕적으로 옳은”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개들을 배불리 먹게 하면서 자녀들을 굶기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지요. 따라서 “유대인의 왕”이 가나안 여자를 돕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인은 예수의 말씀에 수긍합니다. 비판을 가라앉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비판을 수긍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수긍합니다!
“맞아요. 나는 개입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아마 달리 표현하면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서 그 무엇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개보다 나을 것이 없지만, 개들도 당신이 내게 하는 대접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습니다.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는 몇 주 전의 기적적인 급식 이야기를 통해 수천 명이 먹을 충분한 “떡”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부스러기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둘째, 그녀의 “큰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설명
그녀에게 큰 믿음을 가진 여자라고 부르시는 이는 예수이십니다. 그녀는 어떤 대단한 것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즉, 그녀는 큰 믿음도 없고, 위대한 순종도 없고, 위대한 종교적 경건도 없습니다. 그녀는 대단하지 않은 것을 갖고 예수에게 나아갑니다. 그녀는 유대인과 같은 믿음도 없고, 하나님의 계명을 알거나 행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예수께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실 것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큰 믿음”은 베드로의 “작은 믿음”(14:31) 바로 뒤에 등장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그녀는 베드로와 대조된 사람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녀가 “당신이 다윗의 아들이라면 제 딸에게 나으라고 명령하십시요”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베드로와 동일한 범주에 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결코 물러섬이 없이 외칩니다. “주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이 여인은 예수를 시험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또는 당신이 나를 도와준다면?"
이 여인은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 주님, 그렇습니다.”
믿음은 안에서부터 나온다
이 본문과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Flor McCarthy의 교회력 A해를 위한 예전들에 나오는 이야기).
천국에서 심판을 받기 위해 대기하는 신앙이 무척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대기하는 동안 대기하는 것에 관해 불평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이 세상에 있을 때 “죄인들”이라 알던 몇 사람이 대기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그 죄인들은 부패한 정치인, 절도죄로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은 떠돌이 여자, 매춘부, 마약 중독자,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남자 등이었다.
그들이 한 사람씩 도착할 때마다 첫 번째 그룹의 적개심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들 사이에서는 대화가 오고갔다. 조금 후에 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이 들려왔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죄 많고 악한 삶을 살고서도 여기에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의지하고 있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들어올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하도록 만든 것이 무엇인가요?” “물론 우리들의 착한 삶이죠.” 그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렸다.
첫 번째 그룹이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불평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이 들어온다면 정의는 사라질 거예요. 어쨌든 우리는 모든 것을 희생했잖아요. 그건 공평하지 않아요.”
많은 신학자들이 이 사건에서 예수는 여인과 주고받는 대화에서 보다 중요한 통찰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성에 관한 조직신학적 정의들의 일부를 곤란에 처하게 하기도 합니다.
고통 받고있는 이 여자에게서 예수는 그의 선교에 대한 근본적인 비전을 이해하게 됩니다. 여자가 계속 부르짖을 때(동사는 계속적인 행동을 암시하는 미완료시제이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그녀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합니다. (제자들이 사용한 동사는 모호하고, 육체적으로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고통의 상황이나 법적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예수는 자신의 목적에 관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24절)
그런데 이 여인으로 인해, 여기 국경 지대에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선교에 대한 관점이 이방인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확장되게 될 것의 전조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말은 예수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에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없어도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긍정하게 했습니다. 예수는 이 여자의 믿음을 크고 놀랍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던지, 우리가 공평한 것은 그것이 바로 믿음은 안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설령 ‘개’라는 지칭으로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에도 우리에게 아무것이 없어도 우리의 부모, 형제, 그 누구도 나에게 힘이 되어줄 수 없은 가혹한 시련 앞에서도 ‘큰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안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찬양 _ 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주기도 (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