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59번 시편 136편

(인도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회중)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인도자)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회중)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인도자)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회중)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인도자)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회중)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인도자)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회중)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인도자)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회중)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게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12)

송영 _ 찬송가 4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등록하기

찬양 _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말씀 _ 마태복음 16:13-20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너무도 유명한 고백이지요. 이 고백은 예수님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지방에 있는 가이사랴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들 중의 한분’ 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과 제자들의 대답은 다를까요?

예수님은 분명 사람들과 그의 제자들의 대답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도 세상의 사람들이 ‘예수’를 2000년 전과 다르지 않게 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저와 함께 예배하는 여러분은 다른 대답을 갖고 계실까요?

‘아직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직 모르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흔히 말하는 너무도 명확한 정답이지요.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바른 이해를 제공하지만, (다음 주일의 본문인) 후속 구절들에서 메시아이신 예수가 어떤 일을 하실 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베드로를 통하여 우리는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이미 그를 향한 고백이 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

Eugene Boring (Matthew, New Interpreter's Bible)은 빌립보 가이사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북쪽으로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는 그 이전에 바알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고, 그곳의 유명한 동굴과 샘에서 판(Pan)이라는 신을 숭배했다. 헤롯 대왕이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신전을 세운 이후에 그 도시 이름이 바뀐다.
헤롯의 사후에 이 도시는 그의 아들 빌립의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빌립은 도시를 확장해서 황제 티베리우스와 자신의 이름을 따라 그 도시 이름을 지었다. 66-70년의 전쟁동안에 가이사랴는 로마의 장군 베스파시안의 휴양지였다.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 정복을 시작했으며,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 정복을 완결하는 책임을 아들 티투스에게 맡겼다.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티투스와 그의 군대가 가이사랴로 다시 돌아왔는데, 요세푸스는 티투스가 가이사랴에서 유대인 포로들 일부를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로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The Jewish War 3.9.7., 44-44; 7.2.1. 23-24].
마태가 (누가가 생략하고 있는) 이 장소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 우연일 수 있겠지만, 마태가 마가의 길 위의 배경을 생략한 것을 보아 이 중요한 장면이 유대 민족과 종교와 연관이 있는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기를 원했을 수가 있다. 마태는 유대의 메시아이신 예수에 대한 고백 장면의 배경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한 로마사람들이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고, 오랫동안 이방인과 유대의 계시 사건들과 연관이 있는 숭배지인 황제의 신전으로 삼고 있다(cf. 1 Enoch 12-16). [p. 342]

예수를 메시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는 쉬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예수’를 고백하는 것과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고백하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한국교회는 ‘교인’이라는 단어를 흔히 사용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지요. ‘교인’이라는 좁은 의미가 교회 안에서만 ‘성도’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리사랴와 명확한 대조는 (마태복음에서만 나오는 표현인)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장소와 죽은 우상들을 섬기는 사람들 사이의 더 명확한 대조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의 질문과 대답

“사람들은 인자가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가?”

헬라어 안트로포스(anthropos)가 문장에서 두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에서 예수는 “사람/인자”를 사용하지 않고, “나”를 사용합니다.

“인자”는 종말론적인 칭호이거나 단순히 에스겔서에서 사용된 것처럼 “이 사람”이라고 말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는 인칭이 사용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이 누구라고 말하는가?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서는 “너희”라는 인칭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너희,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하십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너희”는 복수이다. 이 질문은 베드로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에게 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답하는 베드로는 어떤 때는 제자들을 대표하고, 어떤 때는 모든 신자들을 대표하고, 어떤 때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서는 독특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두 6회 등장합니다.((1:1, 16, 17, 18, 2:4; 11:2).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제자들의 첫 번째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이 이어지고 있는 부분에서 등장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하는 지점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 반드시 믿음이 있다는 표시는 아닐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26:63), 서기관과 장로들(26:68), 그리고 빌라도(21:17,22)가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부르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를 그들의 메시아/그리스도로 믿지 않은 사람들이지요.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르는 것과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 것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고백의 근원/원천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 또는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믿음이 있다는 표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이 본문이 제공하는 한 가지 대답은 우리가 그 고백의 원천을, 즉 그 고백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가,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17-19절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을 계시한 분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바른 신앙고백은 계시, 즉 하나님의 선물로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교인들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한다, 내가 예수를 영접한다. 내가 성령을 받았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를 너무도 쉽게 이야기합니다.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바른 고백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쉬운 말로 우리의 ‘고백’이 자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고백이 믿음의 ‘과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고백은 때론 내가 감당할 수 없지만 너무도 강렬하게 내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때론 그 의미를 모르면서도 이 ‘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인도되어집니다. 베드로는 이 고백을 할 당시에 메시아이신 예수가 어떤 일을 하실 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서두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이 고백으로 베드로는 그의 생 전체가 그의 실수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이 ‘고백’을 통하여 완성되어 갑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게서 주신 마음이고 이것을 ‘계시’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믿음’은 진정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 반석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며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의 공동체의 설립자가 될 때 새로운 이름을 받은 것처럼 베드로도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반석”의 의미, 또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베드로는 단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연약함, 성급함, 배신을 우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석이 베드로의 훌륭한 고백이나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지, 베드로 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인 신학적 해석입니다.

예수께서는 좀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할 순 없었을까요?

에클레시아(교회)

교회로 번역된 단어인 에클레시아(ekklesia)는 원래 지역의 정치적인 회합, 즉 마을 회의에 “소집된”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은  ekklesia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단어를 사용한 유일한 복음서입니다.

교회의 힘은 교회의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의 견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인들이 신뢰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망이나 악의 세력은 교회를 이길 수가 없는 이유는 우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조차도 교회를 파괴하거나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베드로의 지위를 파괴하지 못할 것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천국 열쇠

베드로에게 주어진 천국열쇠는 가르치는 권위를 상징합니다(참조, 이사야 22:20-25). 이것은 또한 푸는 것과 묶는 것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은 권위 있는 가르침, 토라를 해석하고 특정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권위,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을 선언할 수 있는 권위를 뜻하는 랍비 용어입니다. 이 권위가 18장 18절에서 교회(ekklesia)에 수여되고 있습니다.

Carter (Matthew and the Margins)는 “매는 것과 푸는 것”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용어들이 공동체에서 사람들을 배제하고/포함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참조,18:18)를, 더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나 율법(성경)이 하나님의 통치의 표현으로서 무엇을 금지하고 허용하는지를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를 논의한다(참조, 5:19). 랍비 유대 사상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다 지지한다. 그리고 두 임무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받는 바른 생활방식을 아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서로 관련된다.
더욱이, D. Balch는 “풀다”는 동사가 “국가나 국민의 구성에 대한 헬라의 정치적 논의들과 법률들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단어는 제국의 설립자들의 율법(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이스라엘의 설립자인 모세)이 폐지되어서는 안 되지만(참조: 5:17), 새로운 상황에 맞게 개정하거나 폐지하기 위해 변경할 수 있다는 모순된 주장을 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예수의 명령은 베드로와 제자 공동체(18:18)에게 “위대한 계명조차, 즉 특히 모세 율법과 그 자신의 계명들까지도 풀거나 폐기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p. 336]

이 권위가 계속 필요한 것 같지만, 그 권위는 우리가 오늘의 세상에 복음과 성경의 진리들을 적용하고자 할 때 종종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종종 서로에게 동의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이 권위가 누구에게 제공되고 있는가요?

교회 안팎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질문을 다시 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통해 ‘천국의 열쇠’를 받고자 하는가?”

흥보와 놀부라는 전래동화가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바로는 ‘천국의 열쇠’는 놀부의 마음일 수 있습니다.

흥부처럼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깊은 마음의 울림에 먼저 귀를 기울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등록하기

찬양 _ 찬송가 411장 아 내 맘 속에

주기도 (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