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46번 시편 104편
(인도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회중)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인도자)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회중)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인도자)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회중)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1-5)
(인도자)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회중)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인도자)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회중)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인도자)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회중)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인도자)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회중)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9-13)
송영 _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86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말씀 _ 마태복음 16장 21~28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뒤따라오려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왜 누군가가 기독교인이 되길 원하는 걸까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고 하는데, 누군가는 왜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걸까요?”
사도행전을 보면, 신자들은 박해를 받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고 있지만,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왜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할까요?
왜 누군가가, 박해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단체의 일원이 되길 원할까요?
고난의 위협에 직면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합류하기를 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런 유익을 공유하게 하기를 바라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무엇에 매료된 것일까요?
“고난의 공동체 교회”
첫 번째 수난 예고(16:21-23//마가복음 8:31-33//누가복음 9:22)
<<공관복음서의 병행기사들과의 차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사이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예수께서 가르치기(didasko) 시작했다
마태복음: 예수께서 나타내기/보여주기(to show, deiknumi) 시작했다
예수는 마태복음에서, 이를테면 산상설교에서 종종 교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위의 두 단어들 사이의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여주다/나타내다”는 표현에는 그가 왜 죽으셔야만 하는지(dei)를 히브리 성경을 가지고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26장 54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dei)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마가복음: 언급을 하지 않음
마태복음: “예루살렘에 올라가”
Carter (Matthew and the Margins)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하는 이유는, 중심은 늘 주변에 의해 위협을 받고, 제국은 그것의 불의를 폭로하고, 다른 왕국을 홍보하는 사람들에게 반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난은 정치적, 사회경제적 그리고 경제적 엘리트들과의 충돌이 예상되는 이런 상황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p 341].
<<공관복음서의 일치점들>>
어떤 이들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병행본문의 두 개의 동일한 표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 있습니다.
1)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4장10절에서 예수께서 시험받으실 때의 예수의 책망인 “가라! 사탄!”과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난 예고들 중에서 그 어느 것에서도 제자들은 제 삼일에 예수께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긍정적인 약속을 왜 붙잡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보게 될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2) “너의 생각을 ∼에 두다”(setting your mind on, phroneo)는 근본적인 성향이나 태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거칠게 비판하신 것은 이 사건에서의 베드로의 몇 마디 말보다는 그 이상의 것, 즉 그의 내적 태도, 그의 성향, 심지어 그의 본성과 더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후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올바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도 조정”이 필요해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눈을 통해서 보기보다는 “인간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인 우리가 “인간의 눈”으로 보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우리가 인간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것은 우리의 원죄, 즉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그 어떤 것의 암시일까요?
우리 문화(인간의 문화)와 하나님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성향 사이의 차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Wangerin은 그의 책 <The Book of God>에서 다른 관점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이 구절들을 베드로의 관점에서 소설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예수]분은 “이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하셨다. 예수께서 한숨을 내쉬셨다. 우리 모두는 지금 예수와 함께 작은 샘물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한다. 내가 거기에 도착하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날 때 놀라지 않도록 지금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차가운 샘가에 무릎을 꿇으셨다. 예수께서는 손가락을 그릇모양으로 모아서 그 샘물을 뜨셨다. 그 물을 마시기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다.”
내가 다시 말했다. 내가 말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내 마음이 매우 아팠다. 죽임을 당하신다고? 그분은 항상 이 우울한 일을 생각하셨을까?
나는 그분의 손목을 잡고 “안 돼요!”라고 소리쳤다. 그분의 손에서 물방울이 튀었다. “안돼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라고 나는 울부짖었다.
나는 내 감정에 겨워 있는 힘을 다해 그 분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의 손목에서 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기 시작하셨다. 그는 손에 엄청난 힘을 주셨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그분은 분명 내가 그를 위한 사랑에서 그를 설득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을 것이다. 나는 말했다. “오 주님, 이 일이 당신에게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Wangerin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후에, 베드로의 마음속 생각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일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한 순간 저는 베드로입니다만 다음 순간 저는 사탄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사랑이 어찌 주님의 그런 분노를 유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누구든지 ∼하기를 원하면”(24,25절)은 ‘의지’의 문제라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예수를 따를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아는 문제와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 즉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를 원하는가의 문제와 씨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왜 누군가가 기독교인이 되길 원하는 걸까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고 하는데, 누군가는 왜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걸까요?”
그 대답은 아마도 마태복음 16장 25~27절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찾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자기 영혼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인자는 자기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서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것이며, 그 때에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갚아 줄 것이다.
위의 말씀에서 세가지 답을 찾으셨을까요?
1.목숨을 찾기 위함입니다. 목숨을 ‘자아’라는 단어로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함입니다.
2.영혼을 위함입니다.
3.반드시 그날에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주님의 부르심을 깊이깊이 묵상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주기도 (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