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67번 잠언 3장

(인도자)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회중)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인도자)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회중)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인도자)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회중)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인도자)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회중)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에 내리게 하셨느니라
(인도자)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13-21)
(회중)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26)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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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말씀 _ 마태복음 18장 21~35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개의 주요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21-22절)

2. 3부작으로 된 비유와 결론(23-35절)

a. 왕과 종(23-27절)

b. 왕과 동료 종(28-31절)

c. 왕과 종(32-34절)

d. 결론(35절)

그리고 이 교훈의 더 광범위한 문맥을 신학자 스코트는 “분열된 공동체에 대한 마태의 충고”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

오늘의 말씀은 누가복음 17장3-4절의 병행본문과 중요한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첫째,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는 단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둘째, 마태는 죄인을 꾸짖는 것에 대해서도, 회개가 용서에 선행될 필요성에 관해서도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회개가 용서에 선행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죄를 지은 사람들의 회개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 모두를 용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건강(well-being)을 위해서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태는 이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깊은 원한을 품을 때, 그것은 원한을 폼게 한 사람보다 내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용서의 약속이 회개에 선행되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실수에 대해 벌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벌을 주는 사람”에게 우리의 실수를 인정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즉, 용서의 약속이 없다면 과연 누가 회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실수를 숨기려만 할 것입니다.

“용서하다”(aphiemi)는 문자적으로 “돌려보내다” 또는 “갈라놓다”라는 의미을 갖고 있습니다.

용서는 분노나 복수의 감정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용서가 곧 사람들이 화해하게 될 것이라는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원한을 계속 품거나, 둘 사이를 갈라놓은 장벽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노나 복수의 감정을 “돌려보내는 것”으로써 용서는 과거의 사건들과 감정들이 나에 관해 행사하는 모든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 근거해서 만든 “Seventy times Seven Equals Four-Hundred-Ninety, But Then...POW!”(70 X 7=490, 그러나 그 다음에는 빵!)라는 제목의 연극이 있다고 합니다. 연극에서 한 남편이 아파트에 칠판을 두고 아내를 용서한 횟수를 계속 적어갑니다. 아내가 일요일에 스크램블  달걀을 하는 등 남편을 화나게 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남편은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안경을 벗고 칠판 위로 걸어가서 흰 장갑을 끼고 분필 조각을 집어 칠판에 횟수를 표기하고, “당신을 용서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분필을 내려놓고 흰 장갑을 벗고 안경을 쓴 다음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힘차게 걸어갑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Boring (Matthew, New Interpreters Bible)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숫자를 세는 것은 용서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고전13:5)[p. 380]. 모든 번역들이 고린도전서 13장과 관련해서 그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사랑은 잘못한 기록을 간직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숫자를 세지 않는 것이다.“

왕과 종

위의 문단과 대조적으로 이 비유는 채무(또는 대출금)에 대한 기록을 갖고, “갚을 것”을 원하는 왕에게서 시작합니다. 그는 숫자를 셉니다. 그리고 이 왕이 이방의 왕이라는 많은 암시들이 등장하지요.

1. 이 엄청난 양의 돈(10,000달란트)은 권세가 강력한 왕의 세수라고 설명할 수 있다. 헤롯 왕이 매년 그의 모든 영토들에게 거둬들인 것(900달란트)보다 훨씬 많다.

2. 왕의 종들의 “경배”를 받는데(26절), 유대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3. 유대 율법은 아내와 가족을 노예로 파는 것을 금지했다.

4. 유대 율법은 남자가 빚을 졌을 때 감옥에 가두는 것까지는 허용하지만, 고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34절의 basinistai 는 문자적으로 “고문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종과 동료 종들

그리고 다시 종과 종의 동료가 등장합니다. 처음 두 장면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갚을 수 없는 부채 / 갚을 수 있는 부채

2. 용서 / 처벌

신학자 스코트는 이 단락의 상황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곤 이러한 설명을 붙이고 있습니다.

가혹한 처벌은 일관성 구축에서 혼란을 일으킨다. 막대한 규모의 부채도 마찬가지이다. 처벌과 부채의 규모 둘 다 일상을 무참히 깨부순다. 이것은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란 문학적 방식의 일부이다. 그러나 동양의 왕이 자신의 말을 번복하기 때문에 그 낯설음은 더욱더 중대된다. 즉, 그는 그의 용서를 취소하고, 부채를 원래대로 회복시킨다. 헬라 세계에서 이런 행동은 질서 있는 세상을 파괴하는 위험한 일이다.  후원자와 고객의 연대가 깨진 상태에서 왕은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 모두를 위기에 처하게 한다.
… 왕이 그의 용서를 되돌릴 수 있다면, 안전한 이가 누가 있을까? 그러나 혼란은 더 깊어진다. 동료 종들의 보고는 첫 번째 종 자신의 행동과 동일한 것이다. 드디어 동료 종들은 그가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용서하는데 실패했고, 처벌을 요구했다. [p. 277-8]

따라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종들이 적절하게(바르게) 행동했는가?”

그리고 왕과 하나님을 비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언젠가 용서를 철회 하실 것인가? 왕이 용서를 철회한다면 그 때 왕이 진정으로 부채를 없앤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런 많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이 단락의 핵심은 왕이 종을 불쌍히 여긴 것처럼, 긍휼을 베풀 필요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33절). 이는 마태복음을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9:13; 1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3).

그런데 다시 깊이 생각해 보아야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왕의 “동정”(27절)의 감정은 “분노”(34절)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 편으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마태복음 5:22)이라는 말씀에 비추어볼 때, 용인하기 어려운 감정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결혼잔치에 초청받은 손님들이 그 초대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또 다른 비유에 나오는 다른 한 왕의 감정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22:7).  비유들에서 분노한 왕들의 행동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영원한 고통이고, 다른 본문에서는 멸망과 살인이다).

비슷한 처벌과 상황을 5장25-2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가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게 한 푼이라도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러한 왕의 행동을 신학자 카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의 반응은 제국의 권력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종의 무자비한 행동은 왕의 부드러움(soft)을 노출시켜 왕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왕의 부채탕감이 왕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왕의 약점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종의 행동은 매우 분명하다. 종은 왕보다 제국의 게임에 더 능숙하고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히 왕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종은 지금 왕을  두 번 조롱에 노출시킨다. 그의 행동은 왕의 명예에 대한 도전이다. 왕의 반응은 분명하다. 그는 “동정”을 철회하고, 종을 고문한다. 고문은 폭군들이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벌이다. 종을 내어 쫓는 것은 또 다른 이런 상황을 방지하고, 왕이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강력하고 무자비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p. 374]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왕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신가요?

우리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뒤로 하고 다시 본문 말씀의 주제를 생각해 보면 이 비유의 실제 초점은 “사람들 사이의 용서”에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만난 제자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습니다. [Carter, p. 371].

“형제자매”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는 이들에게 약속된 형벌이 언급되는 마지막 절에서  공동체의 관계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다.”

용서는 단순한 말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 단락에 대한 Carter의 결론적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용서는 제자 공동체 안에서의 규범적인 관습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자에게 불순종하는 것에 대해 책임과 형벌이 뒤 따른다는 점에서 다른 통치와 비슷하다. 용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결과를 의미한다. [p. 375]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다시하게 됩니다. 우리가 정의와 용서 사이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정의를 강조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우리가 단지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가?

여러 면에서 이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관해 대답을 주기보다 질문들을 더 많이 제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 본문의 기본적인 적용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처럼 서로를 향해 긍휼을 베풀고, 용서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다른 누구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가장 큰 자들”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노출되는 이런 죄성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결코 변함없는 자비와 용서를 필요로하는 정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한 주간 이 말씀으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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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