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2장 만유의 주 앞에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118번 구주강림(4)

(인도자) 나는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회중)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인도자)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회중)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인도자)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사62:1-3)
(회중)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인도자)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끊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회중)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다같이)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64:1-4)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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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112장 그 맑고 환한 밤 중에

말씀 _ 마태복음 1장 18~25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1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genesis)”라는 말로 시작하지요. 마태는 “족보”나 “출생”을 뜻하는 다른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나심(태어나셨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창세기(genesis)의 헬라어 표현입니다. 세계, 또는 기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70인역의 창세기 2:4에는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의 하늘과 땅의 내력(genesis)이니”라는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5:1은 문자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내력에 대한 책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날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를 만드셨다”고 번역됩니다. 한글개역성경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번역하고 있지요.

이는 마태가 1장의 이 두 부분과 성서의 첫 번째 책 사이의 연관을 의도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새로운 시작, 즉 새로운 창조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Keener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혼합된 혈통을 인정한 성경은 또한 메시아 왕에 대해 이것을 암시했다. 따라서 마태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방인들이 나중에 추가된 것이 결코 아니라, 처음부터 역사에서 하나님의 일의 일부였다고 밝힌다. 마태가 2장에서 예수를 찾았던 동방박사에서부터 28:19의 모든 민족들을 제자 삼으라는 마지막 임무에 이르기까지의 마태복음 전체에서 이방인들을 어떻게 취급하는가를 조사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강조할 때의 마태의 요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마태는 그의 독자들에게 예수가 이스라엘의 유산과 연관이 있는 것만큼 또한 예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분이고, 예수의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에 관해 알게 할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pp. 80-81]

마태는 “역사는 계획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그 계획을 주관하신다. 역사의 모든 것이 한 아기의 출생에서 열매 맺고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는 단 한번도 그친 적이 없지요. 그 “역사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마태의 이야기는 분명 우리를 새로운 시각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 계획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마태는 구약성경의 인물들에 대한 회고로 마태복음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4장까지 구약의 구절들을 인용하고, 마침내 예수가 그 구절들을 성취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아마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 아니면서도) 신약성서의 맨 처음에 배치된 것은 그런 인용을 통해 구약성서와 강하게 연관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이러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보라, 동정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들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여 한 것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1:22~23)

오늘의 본문은 ‘동정녀 탄생’으로 논쟁이 많이 되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해 Eduard Schweizer (The Good News According to Matthew)는 1세기에 동정녀 수태는 그렇게 큰 일이 아니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으로부터 알렉산드리아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많은 위대한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인간 아버지가 없이 태어났다고 추정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출생의 사실은 예수를 유일무이한 사례로 선정되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예수를 그 시대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반열에 들게 했다.  .
그러므로 마리아의 처녀성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복음서들의 탄생기사들은, 다른 기사들과 구별된다는 점이다. 다른 기사들에서 신은 여자나 처녀와 관계를 갖는 것으로 묘사된다. …
동정녀 탄생이 가능한가의 여부는 현대 세계가 묻는 질문이다. 동정녀 탄생은 신약성서 시대의 남자들에게 용인된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이 그가 이와 같은 기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의 여부의 의해 판단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동정녀 탄생이 신약성경에서 그 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 수태 고지는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장에서만 언급될 뿐, 다른 어떤 곳에서 묘사되지 않는다. 마태나 누가 또한 독특한 성탄절 기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 주제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이 질문하는 것은, 처녀 탄생을 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이 탄생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특별한 개입을 볼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때 우리 또한 처녀 탄생의 이 이야기가 이런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가 있다. 즉, 이 탄생은 단지 수백만 명의 출생 중 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적인 의지나 동력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pages 33-35]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정녀 잉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아이에게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예수”(헬라어) 또는 “여호수아”(히브리어)라는 이름들은 “구원자”란 뜻입니다. 이 이름 때문에, 예수의 중요성은 “그가 누구인가,” 즉 족보와 동정녀 수태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정의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무슨 일을 하게 될 것인지, 즉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태가 우리에게 말한 것처럼,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있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Daniel Patt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A Structural Commentary on Matthew's Faith)은 이와 관련하여 다른 시선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예수는 “임마누엘”로 불리지 않는다. 사실 마태는 이 인용을 약간 수정한다. 그는 이사야 7:14에서처럼 “너희는 ∼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들이 ∼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말한다. 임마누엘은 요셉이 아이에게 붙여준 이름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기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가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서, 즉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서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하는 것은 마태복음에서 뿐이다(18:20). 이 선언은 죄의 용서의 맥락에서 말해진 것이다.(참조, 18:15-20). 마태복음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선언으로 끝난다(28:20).
마태에게, 부활 이후에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이신 이는 예수 그 자신, 즉 임마누엘이지, (누가복음/사도행전과 요한복음에서처럼) 성령이 아니다. 내가 짐작하기에, 예수께서 떠나신 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을 것이다. 마태의 공동체는 그 것을 예수의 계속적인 임재로 묘사했다. 누가와 요한의 공동체는 그것을 성령의 임재로 묘사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의 하나님 경험을 몇 마디 말로 표현하려고 시도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어린 아기에서 그것(하나님의 임재)을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 구세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나)와 지금 여기서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고 믿으면서 사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시기에 더 많은 속박, 즉 파티들에 참여해야 하고, 선물들을 사야하고, 지나치게 많은 돈을 써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 혼돈에 빠트리면서 평화의 왕자의 오심을 축하한다. 우리는 생명의 주의 오심을 축하하면서 더 우울해 질 수가 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진정한 것을 더욱더 필요하다는 암시들이다.
진정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구원자”가 태어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은 사실 히브리어 문구(`immanu el)입니다.

이사야 7장14절과 8장8절에 나오는 이 히브리어 문구를 조금 연구하면, `im(영어의 with)이라는 전치사가 (1)“숨겨진 것”과 (2) “일반적이거나 공통되는 것”을 뜻하는 동사 `MM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동사에서 생겨난 명사 `am은 어떤 것을 공동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보통 이방인들과 상반되는 의미의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 사용되고 이것은 `am ha'arez(암하레쯔=“땅의 백성들”)이란 문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또한 동물들의 “떼”나 “무리”에 대해 사용됩니다.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번역은 히브리어의 의미를 완전하게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과 공통점이 있다” 또는 “하나님이 우리 중에 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요한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사이에 살았다”는 표현은 이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14a).

역사는 계획을 갖고 있고 그 계획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그 하나님이 우리 중에 한 사람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심으로 역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구원자 예수가 오늘도 우리와 살아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구약의 말씀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 예수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그 말씀이 우리를 통해 성취되고 있습니다.

예수가 다시 오시는 날, 그날은 예수님도, 천사도, 우리도 알 수 없으나 아버지만 아시고 그날이 오기까지 하나님은 그 계획의 주관자 되시며 마침내 말씀을 성취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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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