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71번 이사야 55장
(인도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회중)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인도자)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회중)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인도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회중)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인도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회중)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인도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회중)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1-3)
(인도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회중)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인도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회중)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다같이)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6-7)
송영 _ 찬송가 4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74장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말씀 _ 마태복음 20장 1~16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20장이지만 19장에서 마태복음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19장과 20장은 함께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19장은 마태의 다섯 번째 단락이 끝났음을 암시하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갈릴리에서 모든 사역을 하셨고 이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시는 중입니다. 신학자 젠슨은 (Preaching Matthew's Gospel)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9장과 20장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천국의 자녀들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문화적 기대와 어떻게 구별되게 살아가는가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신다. 이 장들은 결혼, 이혼, 금욕, 지위, 특권, 그리고 돈과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설교자라면 마태복음 19-20장을 설교할 때에, 기독교 제자직의 특성을 제시하려는 생각을 할 것이 확실하다. [pp. 168-9]
또 카터 (Matthew and the Margins)는 이 두 장을 설명하는 부분에 “하나님의 나라란 또 하나의 대안 가정”이란 제목을 붙이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장들은 가정에 대한 그 당시의 문화의 보편적인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 … 그들(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 신피타고라스 학파, 그리고 헬라주의적 유대사상)은 가정이 네 가지 차원으로 이뤄진다고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가정은 세 가지 관계(남편-아내, 아버지-자녀들, 주인-종)와 부를 획득하는 남성의 임무로 구성된다. 힘의 역학이 관계들을 통제했고, 그 관계에서 남편/아버지/주인은 아내/자녀들/종들을 지배했다. 가정은 남성이 여자들과 자녀들에게 힘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위계적이고 가부장적 구조였다. 가정은 철저한 성차별을 특성으로 하였다. …
19-20장의 단락들은 (이혼을 비롯하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19:3-12), 자녀들(19:13-15), 재물의 획득(19:16-30), 종들이 되는 것(20:17-28)과 같은 가정의 구조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20장1-16절은 그의 재산을 관리하고 일꾼을 고용하는 집주인에 관한 비유이다.
그러나 이 장들은 이러한 가정 구조를 이용하고 있지만, 그것의 문화적 규범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두 장들은 소수의 다른 문화적 견해들에 편승하여, 좀 더 평등한 관점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제공함으로서 위계적이고 가부정적인 체제를 와해시킨다(참조, 20:12). 남편들이 아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관계에 참여해야 한다(19:3-12), 모든 제자는 어린아이들이고, 부모들은 없다(19:13-15).
예수를 따르는 것은 부와 지위를 획득하기 것이 아니라고 제자직을 정의한다(19:16-30). 모든 제자는 예수처럼 종들이며, 주인들은 없다(20:17-28). 20장1-16절에 나오는 집주인의 비유는 삶에 질서를 주는 하나님의 독특하고 다른 방법들의 한 사례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맹인들을 고치시는 결론 기사는 제자들 또한 예수의 능력에 의지하여 다르고 특별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한다(20:29-34).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실 때, 이 장들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통치와 어울리는 대안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제공한다. [pp. 376-7]
그리고 보링(Matthew, New Interpreter's Bible)은 마태복음 19:1-20:34의 단락에 “수난을 향해 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제공하심”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마태복음 19:1-26은 말 그대로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기여하고 있고(참조: 12:46-50),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이혼, 재혼, 독신생활, 자녀들, 젊은이들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 다음에 마태는 Q자료의 짧은 기사를 삽입하고 수정함으로써(19:27-30=누가복음22:30), 그리고, 이 웅장하고 은혜로운 반전으로 인해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 불만을 다루려는 의도로 비유를 제시함으로써(20:1-16), 요구되는 문화적 이해에 대한 철저한 반전의 기초를 제공한다. 마태는 종말론적 비전과 비유 둘 다의 주제를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것”(19:30; 20:16)으로 보고 있다. 이미 인자의 생애를 통해 종말론적 반전이 실현되었고, 인자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에 의해 정당화되지만(20:17-19), 야심과 질투심이 많은 제자들은 예수의 삶의 방식을 여전히 오해하고 있다(20:20-28). 제대로 된 메시아 칭호들을 사용하여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바 있는 제자들은 이제 그들의 눈 멈을 치유 받을 필요가 있는데, 예수께서 그 일을 하실 수 있다(20:28-34). [p. 384]
그런데 젠슨, 카터 그리고 보링 세 사람 모두는 19장과 20장 안에서, 특히 19장 16-30의 부자청년의 이야기와 본문의 연결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20장 1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단어(gar)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앞의 일과의 연관성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는 이유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20장 1절이 “왜 먼저 된 많은 사람들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사람들이 처음 되는가?”(19:30)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 이런 연결성 외에도, 두 본문 모두, 처음이 나중 되고 나중이 처음 되는 것에 관한 거의 동일한 선언으로 끝이 납니다. “나중”과 “처음”은 오늘 본문 8,10,12,16절에서 등장하며 또한 20장 2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셋째, 두 본문이 사람이 행하는 어떤 것, 즉 착한 행동을 하거나 계명을 지키거나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포도원주인의 은혜에 의해 “임금을 지불 받는다”는 개념에 의해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19장의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신학자 롱(Matthew, Westminster Bible Companion)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 관해 이렇게 말하는데, 오늘 본문에도 적용됩니다. “… 우리는 부자 청년이 예수를 만날 때, 두 개의 다른 세상이 충돌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하나는 일반적인 풍습과 가치를 지닌 이 세상이며, 다른 하나는 천국에서 요청되는 철저하게 새로운 생활방식이다.”[p. 220]
부자 청년을 그리스도와의 교제 밖에 있게 한 것은 그의 어떤 악한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선함”이라고 일컫는 것, 즉 계명을 지키고, 그의 재물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것들 때문에 불가능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부자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의롭게 하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더 강하게 했을 것이다”[p. 222]라는 롱의 말처럼, 20장에서 마찬가지로, 집주인의 관대함을 못마땅해 한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임금을 받은 것을 선물(은혜)로 여기기보다는,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느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비유는 두 부분으로 이뤄집니다. 1-7절은 일꾼들을 고용하는 부분이며, 8-16절은 그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많은 공백(gaps)이 있습니다. 우리는 집주인이 왜 그렇게 많은 일꾼들을 필요로 했는지에 대해 듣지 못하고, 마지막에 고용된 일꾼이 왜 놀고 있는지, 그들이 그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시장에 서 있는 것을 왜 보지 못했는지에 대해 듣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추수 때였을 것이고, 그들이 게을렀을 것이고, 그들이 “숨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그 공백을 채우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예를들면 영어역본 RSV에 보면, 집주인은 3절에서 그들을 “본다(see).”라고 말하지만 6절에서 집주인은 그들을 “찾아낸다(found).”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추정들은 흥미롭고 기발한 것이지만, 본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요.
결국 비유는 (우리의 기준에 의해) “올바른” 것을 행하거나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여전히 부족한 우리를 발견하게 해 주며, 우리의 추정의 세계를 뒤엎습니다.
임금을 지불받은 일꾼들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은 집주인의 관대함을 암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한 가정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임금이었습니다. 이 합의는, 이 비유를 하나님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지요. 임금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며 일꾼들은 겨우 생존할 만큼 받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가난한 처지이지만 하루에 대한 그들의 필요가 충족될 것입니다. 집주인이 일꾼들에게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임금을 제공하는 것은 “선한” 것이었고 그것은 관대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관대하다면 “주인의 관대함은 동일한 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와서 일하라는 초대한 것입니다.” 이에 관하 패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간단히 말해, 집주인에게는 그의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들이 필요하고, 일꾼들은 그들의 필요를 채운다. 놀고 있는 사람들은 일이 필요하고, 주인은 그들의 필요를 채운다. 고용과정은 집주인과 일꾼들 둘 다에게 유익하다. 이는 천국을 구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에게 축복이 되고, 축복을 받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p. 275]
첫 번째 일꾼들은 임금에 관해 합의를 한 반면에, 다른 일꾼들은 “내가 너희에게 상응하게 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응하게(dikaios)는 “정당한,”“공평한,”“적절한”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무엇이 정당한가?” “무엇이 공정한가?” “무엇이 공평한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대답이 우리의 대답과 늘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10-11절에서 일꾼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은 품삯을 받고 집주인에게 불평하면서 말했다. 우리와 똑같이 대하십니까?”
그들의 불평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그들은 당연히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더 많은 것에 대한 욕구는 탐욕입니다. 탐욕은 그들이 약속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게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진짜 불평은 다른 두 가지 이유에 있습니다.
(2) “당신은 그들을 우리와 같게 대하였다.”
그들은 일한 시간에 근거한 위계질서를 생각합니다. 그 위계는 지불된 임금의 차이에서 드러날 것이고, 그들은 “우리”와 “그들” 사이를 구별하고,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런 구별은 회중들과 온 세상의 기독교 공동체에게 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3) “우리를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디었다.”
그들은 그들에게 일하고 임금을 받으라는 초대를 은혜(선물)로 보지 않고, 짊어져야 할 짐으로 보고 있습나다.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을 짐으로 간주될 때, 어떤 불완전한 “봄”(seeing)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런데? 너는?
신학자 스미스는 “사람들은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한 계산법을 자기 자신들에게 적용할 때는 보통 이해하고 감사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을 볼 때는 두려워하고 원망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다”라고 요약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18:23-35)는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크게 감사하지만, 하나님(과 나)는 “내게” 죄를 범한 모든 사람들을 반드시 처벌할 것을 원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의 불평은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공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품삯이나 가져가시오. 나는 이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과 똑같이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오? 아니면 내가 선하다고 해서 당신이 악하게 보는 것이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며,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하다는 느낌 때문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선함이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하나님의 자애로운 뜻을 깊이 새기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다른 이들을 통해 빛(Light)을 보는 능력이 생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불의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아요.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이 말씀을 깊이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69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