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69번 이사야 40장
(인도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회중)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인도자)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회중)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인도자)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회중)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인도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회중)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인도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회중)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인도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회중)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다같이)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26-31)
송영 _ 찬송가 1장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300장 내 맘이 낙심되며
말씀 _ 마태복음 21장 23~32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21장에서 예수는 겸손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21:9)
예루살렘에 함성이 가득찹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그리고 예수는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그 일을 아버지와 함께하셨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어 쫓고, 맹인과 저는 자들이 예수께 나아올 때 고치셨습니다. 이 기적들은 어린 아이들의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라고 라는 외침과 함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21:15).
그 시점에 예수는 베다니로 가기 위해 성전을 떠나고, 성으로 되돌아올 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장면이 등장 하는데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었던 “ 너희가 기도 할때에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여기서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오늘 본문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성전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전 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화를 낼 때 그곳을 떠나셨지요. 전날의 행적을 고려할 때, 오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의 자격(권위)에 관해 물은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Boring (Matthew, New Interpreters Commentary)은 예수의 권위에 대한 이 단락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도전(21:23)
A. 예수의 질문(21:24-27)
B. 세 가지 비유들
1. 두 아들들(21:28-32)
2. 주의 포도원(21:33-46)
3. 혼인 잔치(22:1-14)
B'. 세 가지 논쟁 기사들
1. 세금에 관한 논쟁(22:15-22)
2. 부활에 관한 논쟁(22:23-33)
3. 가장 큰 계명(22:34-40)
A'. 예수의 질문(22:41-46)
이와 같은 구조에서 몇주간 말씀을 계속 살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두 아들의 비유”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행위(또는 열매 맺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이 짧은 비유는 행위가 말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짧은 비유는 마태 공동체에 내재한 교회/회당의 갈등관계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두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해라.”
첫째가 대답합니다. “싫습니다.” 그런데 곧 후회하고 가서 일을 했습니다.
둘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라고 말하였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들이신가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느냐?”
“첫째입니다.”
Scott(Hear Then the Parable)은 두 아들 모두 잘못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명예의 관점이라고 말하는데 “아니오”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를 명예를 떨어뜨린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두 아들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요구받을 때, 딜레마가 발생한다. 한 아들은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서, 다른 아들은 “예”라고 말하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음으로써 두 아들 모두 아버지를 모욕했다. 한 아들은 포도원에 들어가서 가족을 도움으로써 가족의 결속을 확인한다. 다른 아들은 표면상으로 착한 아들인 것처럼 보임으로서 가족의 훌륭한 이름을 유지한다. 아버지가 공개적으로 공경을 받고 사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것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고 개인적으로 공경을 받는 것을 선택했을까? 1세기에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아버지가 어느 아들에게 화를 냈는지에 있다. 그러나 선택해야만 한다면 그는 보이는 것과 실제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고, 가족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가족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p. 84]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명확한 대답을 알고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밭에 가서 일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피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 비유의 실마리는 29절의 “뉘우치다”입니다.
NRSV는 이 단어를 “마음을 바꾸다”(29,32절)로 번역하고 있습니다.(한글개역성서에서는 30,32절에서 “뉘우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헬라어로 메타멜로마이(metamelomai )입니다. 이 단어의 동사 melo는 “보살피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바꾸다” 또는 “자신이 가장 걱정하는 것을 바꾸다”로 번역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29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글개역성서에서는 30절입니다.)
그가 “나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헬라어에서 현재시제임)라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그의 마음(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에 갔다.
우리는 32절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그들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또는 구약의 어법을 사용하면, “그들의 마음이 강팍하여졌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신 다음 날, 예수께서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셨고, 지도자들은 체제를 뒤엎는 이 남자에게 도전하기 위해 함께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즉 어떤 권위로 변화시키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지와 누구 그에게 그렇게 할 권리를 주었는지 말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다. 너희가 내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지도자들은 또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요한이나 요한의 개혁과 준비의 메시지를 믿기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과거 행동을 보면, 그들은 요한의 권위가 땅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해야 했지만 무리들이 그 대답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무리들이 무엇을 받아들일지에 대한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할 뿐입니다.
예수께서도 지도자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는 않으셨지만, 세례 요한의 권위에 대한 예수의 질문은 그의 권위가 요한의 권위와 같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짧은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설명하면서 지적하신 것처럼, 그들은 요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들이 요한을 믿었더라면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바꾸었을(회개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 세리와 창녀들의 삶에서 증명되었듯이)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증명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아니오”라고 말했지만, 그의 마음을 바꿔 아버지가 요구한대로 일하러 간 첫 번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는 32절에서 그들에게 아직도 그들의 마음과 길들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시는 중십니다.
심판의 와중에서도 친절과 기회가 있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32절)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요한의 권위의 증거를 사람들의 삶에서 본 후조차도 계속해서 고집을 부려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가진 통제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이 게으름이나 반항 때문이었을까요?
예수께서는 성전 지도자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의 회개가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들에 관해 믿고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야만합니다.
예수께서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는 질문으로 비유를 시작하실 때, 지도자들에게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 비유를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의 권위를 따를 것인지, 어떤 종류의 “순종”을 보일 것인지를 결정할 것을 요구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금 마음을 바꾸셨는지요?
권위의 증거는 좋은 열매에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추석이 지났습니다. 풍요로움은 열매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짜 열매를 보십시오. 선함, 친절, 절제, 인내, 사랑, 기쁨, 평화, 관대함, 온유함의 삶을 보십시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찬양 _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