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82장 빌립보서 2장

(인도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회중)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인도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회중)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인도자)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회중)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인도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회중)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인도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회중)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다같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5-11)

송영 _ 찬송가 3장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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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말씀 _ 마태복음 22장 1~14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 의 1996년 가을 호에는 “The Parable of the Royal Wedding Feast (Matthew 22:1-14) and the Parable of the Lame Man and the Blind Man (Apocryphon of Ezekiel)”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pp..471-488쪽). 저자는 정경에 나오는 비유(특히 “어떤 사람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했다”는 누가의 버전[14:16]보다는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여는 마태의 버전에 대해)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공합니다.

[RB] 왕의 아들의 결혼잔치는 주요한 정치적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분명한 축하행사이다. 뒤따르는 이야기의 정치적 성격을 제대로 평가하는 주석가들은 소수이다.
[RB]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왕국의 훌륭한 사람들이 참석하는 것은, 그들이 왕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필수적인 표현일 뿐만 아니라, 왕위의 합법적인 계승에 대한 그들의 충성의 표현이기도 했다.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의 변명은 거의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누가의 비유에 나오는 초대받는 사람들과 달리) 마태의 기사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무 변명도 제공하지 않는다.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한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초대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왕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멸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이 반란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의도한 것이고, 왕의 메신저들을 죽이는 사람들은 이런 뜻을 더 단호하게 알린 것이다. 왕은 마치 반란에 대응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대응한다(7절). 주석가들이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의 정치적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7절을 이야기 속에 어울리지 않게 삽입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알레고리적 언급으로 설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p. 484]

예수는 악한 소작인의 비유(21:33-46)에 이어 22:1-14에서 또 하나의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는 아들을 위해 결혼식 하객들을 초대하는 왕으로 비유됩니다.

22절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베푼 어떤 왕과 같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속된 비유 말씀은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청중을 놀라게 하는 가공의 체제 전복적인 이야기입니다. 비유에서 알레고리(은유)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본문의 요소와 다른 외부의 구절들은 임의로 연결 지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왕은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과 같지만, 결코 하나님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아들 또한 예수가 아닙니다. 초대받은 손님을 부르러 나간 그의 종들은 선지자들이 아니며, 초대받은 손님들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왕의 폭력적인 반응은 예루살렘 멸망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실제로 알레고리적 해석에서는 혼인 잔치 비유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왕은 왜 처음부터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사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 잔치에  초대하지 않았을까?

왜 그 사람들을 처음부터 초청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차별했을까?

초대받은 하객들이 어떻게 왕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을까? 주종관계가 만연한 전통 사회에서 이러한 거부는 비현실적이며 사회적인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왕을 하나님과 비교할 때, 거절하는 하객들에게 왕이 가하는 극단적인 폭력과 혼례복을 입지 않은 하객에 대한 가혹한 대우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왕에 비교할 때, 이 비유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이 비유는 앞의 두 비유인 두 아들과 악한 소작인 비유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비유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부르심과 초대를 받았지만, 그것을 소홀히 했고, 자기 사업으로 분주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일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다시말하면 처음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문을 열고, 전통을 깨뜨리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일을 계속하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엘리트들의 지위와 권위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방식들은 급진적이고 혁명적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의 초대는 그들이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되었습니다.

“요한의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32).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적인 연회에 참석할 자격이 있습니다.

마태의 맥락에서 이 비유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이어지는 본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열매가 있다는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마태는 초청받은 사람들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초청받은 자들은 자격이 없고”(8절)

“악한 자들이나, 선한자들이나 아무든지 만나는대로 잔치에 초대하라.”(9절)

우리는 "왜? 우리를 초대하였는지? 내가 왜 초대 받았는지?"에 대하여 고민합니다. “나를? 왜?......”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5:45).

하나님은 또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신다”(5:45).

사랑받는 사람의 공동체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13:36-43)와 그물 비유(13:47-50)에서도 또한 관찰됩니다. 마태가 보기에 어떤 심판도 종말이 오기까지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태는 이 비유를 종말론의 맥락에서 모든 사람이 현재를 전심으로 살아감으로써 종말에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친구여, 어떻게 결혼 예복도 갖추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는가?”(12절)

결혼 예복은 하나의 은유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Patte은 예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비유의 첫 번째 부분에 따르면, 혼인 잔치에 오라는 초대에 응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초대에 응하는 이유는, 그 초대 받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기에 왕에게 영광을 돌리길 원하거나, 관대하고 선한 잔치 주최자가 제공하는 잔치의 좋은 음식을 대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 “혼인예복”을 입는 것은 초대받은 영광에 대한 응답으로 왕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이 혼인잔치에 오라는 초대에 응한 이유는, 그 행사가 참으로 좋고 훌륭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혼인잔치에 가는 사람은 거기에 가면 훌륭한 음식이 있고, 왕이 좋은 것들을 주고 관대하다는 것을 알고 인정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왕의 선함을 인정하고, 그 인정은 (혼인잔치에 가는) 행동으로 표현된다.
… 그러나 이 비유와 21:18-22:14의 요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데 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 필요가 있고, 그 인정은 단순히 그의 선함을 인정하는 태도와는 다른 (혼인 예복을 입는) 태도에서 표현된다.  사람의 행동의 동기로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이런 인정과, 그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의사가 없다면, (지금과 장래에)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가 가능하지 않다.

마태의 결론은 21장 14절에 있습니다. “청함(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청함(부르심)을 받는 것”은 초대이고, “택함을 받은 것” 좋은 결과 때문에 하나님이 그 청함(부르심)을 승인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나를? 왜?”라고 반문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미루지 마시고 초대에 기뻐하며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로 결심하는 오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이 초대는 소용이 없고, 삶에서 실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선택받을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은 적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이후에 예복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복을 준비한 사람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깨닫는 오늘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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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