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104번 종교개혁주일

(인도자)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회중)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인도자)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회중)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인도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회중)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오니
(인도자)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회중)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인도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회중)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인도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회중)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하-32)
(인도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회중)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다같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15:57-58상)

송영 _ 찬송가 5장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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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말씀 _ 마태복음 22장 34~46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그들이 예수께 한 질문과 두 번째 예수께서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22장에서 예수께 한 세가지 질문 중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이고(17절), 두 번째 질문은 사두개인들의 “부활 때에 그녀가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입니다.(27절).

오늘 본문의 질문은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입니다.

이후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고 다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오늘의 질문은 우리들의 질문이요. 또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물으시는 말씀으로 생각해보아도 2000년의 시간과 상관없이 지금도 여전히 그 질문이 우리에게 유효한다는 것, 이러한 질문이 우리의 삶에서 매일 일어나시길 소망해 봅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묻고(물으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온 마음을 다하고 네 온 목숨을 다하고 네 온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그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들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예수께서 구약의 두 구절(신명기 6:5, 레위기 19:18)을 인용하셨습니다. “사랑하라”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르게 된 것이겠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Malina Rohrbaugh(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는 “사랑과 미움”에 대한 긴 “읽기 시나리오”를 갖고 있습니다.

1세기 지중해 사람들은 지극히 집단 지향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 집단은 주로 친족, 마을, 이웃, 그리고 가입할 수 있는 파벌이나 그룹을 의미했었다. 이 그룹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한 개인에게 자아의식, 양심, 다른 사람들의 위해 자신이 유지된다는 의식(일깨움)을 제공했다. 1세기의 지중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고, 자신이 선택한 행동을 지지하거나 막을 다른 사람들을 늘 필요로 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집단은 외적 양심이었다.
이러한 집단 지향성은 존재에 대한 반성찰적 방식이 생겨나게 했다. 사람들은 심리적인 것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가 심리적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영혼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적 배열에서 내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들에는 그에 어울리는 외부 표현을 함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알다”는 단어에는 항상 아는 대상에 대한 어떤 경험이 수반된다. “탐하는 것”에는 사람이 바라는 것을 취하려는 시도가 수반된다(그러므로 이 단어는 “훔치다”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 사회에서 내적 상태에 거의 늘 따라다니는 두 단어는 “사랑”과 “미움”이다. 1세기 지중해 세계에서 이 두 단어가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하려면 집단 지향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용어는 “집단 애착, 어떤 사람에 대한 애착”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다. 따라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주인을 사랑하는 것”은 “헌신하다”로 의역된다. 거기에는 애정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사랑에 수반되는 애착과 결부된 외적인 행동과 함께 내적인 애착 감정이 있게 된다.
따라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적인 애착을 의미하며(22:37),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19:19)는 것은 자신의 가족에게 애착을 가지는 것처럼, 이웃에 있는 사람들에게 애착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가족 간에 불화가 생기기 전까지는 집단 지향적인 지중해에서 매우 정상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미움”은 “반애착, 비애착, 무관심”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거기에는 혐오의 감정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움이 수반하는 것은 집단과 그 집단에 속한 사람에게 애착을 갖지 않는 것과 관련된 외적 행동과 함께 비애착이란 내면의 감정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를 향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가 있고(마태복음 6:24, NRSV에서는 “멸시하다”로 번역함), “서로 배반하거나”(24:10), “사람의 사랑이 식을 수”도, 즉 무관심속에 있을 수가 있다.
“미워하는 것”은 "집단에서 분리하다"와 같은 뜻이기 때문에, 예수와 복음을 위해 가족을 떠나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등을 “미워하거나”(눅 14:26),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거나”(마 10:37) “모든 것을 버리거나”(마 19:27, 막 10:28), 더 정확하게는 “집”(눅 18:28)을 버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한마디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나오는 바울의 그 유명한 믿음, 소망, 사랑은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매우 좋을 것이다. “개인적 충성심, 타인에 대한 지속적인 신뢰, 집단적 애착”, 그리고 물론 이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집단적 애착이다. [pp. 57-58]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애착, 즉 개인의 내면적 감정을 뛰어넘는 헌신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고요. 이 계명(레위기 19:17-18)의 구약적인 맥락에서 이웃은 “친족”을 가리켰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19:33-34에서는) 그 사랑을 그들 사이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로 확대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을까요?

그런데 Hare(Matthew, Interpretation Commentaries)는 이 단어(사랑)에 대해 약간 다른 정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크게 남용되는 시대에서, 성경적인 사랑의 주요한 구성 요소는 애정이 아니라 헌신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을 생각할 때 감사란 따뜻한 감정이 우리의 의식을 가득 채울 수 있지만, 신명기 6장 5절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따뜻한 감정이라기보다는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헌신이다. 마찬가지로, 원수를 비롯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그들에게 애정을 느껴야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곤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다. [p. 260]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단순한 따뜻한 감정 그 이상입니다. 그 사랑은 종종 “연습, 준비, 그리고 노력”을 수반해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들에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약간의 “엄한 사랑”(tough love, 상대를 생각해서 엄격한 방법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항상 쉬운 것이 아닙니다. 특히 “엄한 사랑”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랑은 늘 뜨거운 감정들이 아닙니다. 때로 사랑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랑의 행동들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께서 바로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Erik Gritsch은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윤리는 ‘내게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때 기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랑”입니다. 사랑을 알아야 “내게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매일의 질문에서 가끔은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에 관해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대답을 하신 후,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그 자신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인가?”(22:42a).

이 질문은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성경해석에 근거하여 올 것이라고 믿었던 “기름 부음 받은 자”(christos)에 관한 그들의 기대에 대해 물으신 것이지요.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러 번 하신 특정 약속들에서 비롯된 확신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주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이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해서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게 될”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30:9)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포로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 “내가 내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의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에스겔37:25).

이 예언적인 본문들이 “다윗”을 언급할 때, 다윗의 유전적 혈통을 통해 오게 될 미래의 왕을 뜻하는 것이고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옳은 답변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태복음1:1)는 복음서의 첫 문장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확인하며 마태의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기본 추정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그 이상이 될 것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는 이 메사이적 인물에 대해 말하신 후에, 이렇게 물으신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게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였도다 하였느냐 다윗의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태복음 22:43-45).

다윗은 시편 110편의 저자입니다. 이것은 다윗 스스로가, 주 하나님께서 “내 주”-메시아로 해석됨-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우편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한다는 뜻이됩니다. 그러나 만약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다윗이 그를 “내 주”라고 묘사하는 것을 예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논점은, 그리스도가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며, 동시에 다윗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는 데 있습니다.

중세의 한 미드라쉬(유대인의 성경 주석)에 따르면, “메시아는 아브라함보다 더 높고… 모세보다 더 높으며… 섬기는 천사들보다 더 높으실 것이다.” 예수의 메시아적 지위가 …다윗보다 더 권위 있고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다”(마 12:42)

예수께서는 ‘나사렛’과 ‘다윗의 자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 구절에서 언급하신 “다윗의 자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의 약점은 메시아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적들을 멸망시킬 다윗과 같은 정복 영웅으로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 1절은 메시아가 매우 다른 유형의 왕이 될 것이며 그 왕을 향해 다윗조차도 주님이라고 불러야한 할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의 자손인가? 이스라엘의 메시아 소망의 근거가 되는 본문은 나단의 다윗을 향한 신탁입니다.그 신탁에서는 약속된 다윗의 후손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사무엘하7:14).

우리들의 생각과 질문은 어디에 국한되어 있을까요?

“더 높고 더 높으며 위대하다.” 이 말씀이 우리의 심장에 자리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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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368장 주 예수여 은혜를 내려주사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