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35장 큰 영화로신 주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63번 시편 145편
(인도자)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회중)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인도자)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회중)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인도자)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회중)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인도자)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회중)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인도자)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회중)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1-10)
송영 _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490장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말씀 _ 마태복음 23장 1~12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 둘 모두에게 향하시는 이 말씀은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과 오늘의 말씀뿐입니다.
그런데 산상에서의 말씀이 축복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오늘의 말씀은 그와 정반대의 말씀을 다루고 있습니다. “화, 있으라!.” (23:13)
하지만 산상설교와 23장은 모두 외적 행위와 대조되는 내적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23장은 “저주를 받은” 사람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말해진 것이 아니라,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말해졌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을 평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평가를 떠올려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또는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설명하실까요?
예수의 비판
신학자 보링은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3가지를 지적하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23:3c)
(2) 그들 자신은 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을 지운다(23:4). 바리새인들은 특히 성전파괴로 인해 실제 제사장들의 기능이 중지된 이후에 백성들 전체에게 제사장 나라로서의 그들의 소명에 따라 살라고 권면했다(출애굽기19:6). 다시 말해 그들은 제사장의 정결율법을 백성들 전체에게 적용했다. 마태는 그들의 노력을 하나님의 율법을 인간의 전통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일반백성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잘못된 짐이었다(15:1-20).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의 어깨에 얹은 “짐”의 대안은 예수의 “멍에”이다(11:28-30). 그 멍에가 쉬운 이유는 것이 덜 엄격하기 때문이 아니라(5:17-48),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p. 431]
(3)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는 잘못된 이유로 행동한다(23:5-7).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등장하기 시작한 랍비 지도자들은 경건의 외적 표징을 강조했는데, 그들이 외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진 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원주의적 사회에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구별하는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교가 주변 세계에 동화되는 것을 염려했었다. 마태의 교회는 이러한 관행을 따르라는 유혹을 받았으며, 회당 지도자들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Boring, p. 431]
이 부분에 대하여 Long(Matthew, Westminster Bible Companion)은 이 비판에 대해 이렇게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경문과 옷 술의 참된 목적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항상 성실하게 마음에 떠올리고, 예배자들의 기도생활을 돕는 데 있었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것들을 패션 장신구로 바꾸어버렸다. 오늘날 2파운드짜리 십자가를 차고 다니거나 “나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라는 범퍼 스티커를 차에 붙이는 오늘의 기독교인에 대해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인가, 과시인가, 찬양인가, 허세인가? [p. 259]
종교개혁의 쟁점 중 한 가지가 예술품이었습니다. 예술품이 하나님을 숭배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아니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새긴 형상들”이었는가? 이 질문은 종교개혁 내내 따라다니는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2장 8절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결국 중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거짓된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 중심을 아십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보면 3~7절까지가 ‘그들’을 향한 평가라면 이후 8절부터 제자들과 무리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첫째, 랍비라고 불리지 않도록 해라. 왜냐하면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분 뿐이시다.
셋째, 다시 한번 말한다. 너희는 지도자라고 불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왜냐하면 너희의 지도자는 오직 한분 곧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당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오직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요.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뿐입니다.”
높아지는 것과 겸손
오늘 말씀의 결론이 12절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12절에서 2회 등장하는 “높이다”(hypsoo)는 동사는 11장 23절에서도 등장합니다.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이런 높아짐의 반대개념은 회개하려는 의지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삶에서 결여되었던 실천이었을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높일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회개했는지에 대해 자부심을 표명할 수 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12절에서 2회 등장하는 “낮추다”(tapeinoo)는 동사는 18장 4절에서도 등장합니다.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낮추는 것의 반대개념은 어른인 것 같습니다. 1세기나 21세기나 높임을 받은 바리새인들을 생각할 때, 어린아이를 떠올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Long (Matthew, Westminster Bible Companion)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본문에서 무엇을 얻든 간에, 우리는 종교 박해의 비극적인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때때로 기독교인들은 그 박해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예수의 진노 가득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때에 기독교인들은 강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그들의 힘을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런 경우에 예수의 말씀은 경고의 역할을 한다. [p. 264]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힘을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학교 폭력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이 말씀은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가 가진 힘과, 능력, 정보, 앎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 위에 굴림하려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계속해서 우리들을 닮아갈 것이고 언젠가 이 말씀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은 ‘유아’(baby)로 변경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이사야 57:15
우리들의 학교,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높임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다시한번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