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125번 사순절 제2주

(인도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회중)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인도자)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회중)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인도자)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회중)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1-3)
(인도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회중)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인도자)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회중)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인도자)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회중)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인도자)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회중)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인도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회중)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8-11)

송영 _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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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말씀 _ 요한복음 3장 1~17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지만, 이 구절이 예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Craddock (Preaching Through the Christian Year A)은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17에서 교회는 예수께서 한 종교지도자(니고데모)에게 풍성하고 영원한 생명은 위로부터 오는 선물이며, 업적과 증거에 의해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사순절만큼 기도와 금식이 어떤 것을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님을 상기시켜주기에 적절한 때가 없다”(p. 159).

상징으로서의 니고데모

Craig R. Koester (Symbolism in the Fourth Gospel: Meaning, Mystery, Community)는 니고데모를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외견상으로는 혼자 온 것 같지만, 그가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갑자기 11-12에서 “나와 (단수) 너”를 “우리”와 (복수) “너희”로 변경하시지요. 요한은 이 장면을 두 사람들 사이의 대화 이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1) 바리새인들 - 정직하고, 율법을 준수하고, 순종적이고, 종교적인 유대인들

(2) 예수가 행한 표적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

(3) 모든 사람일 수 있습니다.

(1,4,19절의 anthropos-이 단어는 오늘 본문 바로 앞인 2:25에서 두 번 사용)

[예수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2:25)

또한 우리는 니고데모를 통해서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가에 관해 조금 배울 수 있습니다.

어둠()과 빛의 이분법

바리새인드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2)

니고데모가 “밤에”(2절) 왔던 것은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19:38-29), 반면에 Koester는 “밤에”를 어둠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 상징은 (오늘 본문에 속하지는 않지만) 3:19-21에서도 등장합니다. 만약 니고데모가 사람, 즉 어둠 속에 있는 세상을 대표한다면, 그 때 그의 예수에게 나아옴은 빛으로 나아옴을 암시하고 있는걸까요?

그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의 관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도덕적인 삶을 살았고, 모세 율법에 순종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어둠과 연관이 있는 살인, 도둑질, 간음 등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어둠에 있다는 것은, 또느 어둠 속에 찾아왔다는 것은 한 사람이 빛 가운데 있는지, 어둠속에 있는지는 그 사람의 도덕성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예수님을 향한 반응을 보고 알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와 바른 관계에 있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3:21)

만약 니고데모가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면, 아마도 니고데모 같은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어둠 속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빛으로 나아오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어떻게 다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날 순 없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에서 난 것이다.”

“위로부터 태어나야한다고 말했다고 해서 놀라지 말아라.”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수 있습니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증언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내가 땅의 일들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고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늘의 일들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 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려 올렸던 것처럼 인자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람/성령의 신비를 넘어서, 니고데모가 아직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또는 그가 아직 예수의 빛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바람/성령의 근원이나 참된 신자들의 근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었을까요?

사람들이 기독교를 우리들이 행하는 어떤 일로 간주하는 한, 즉 그들이 기독교를 순종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정하는 어떤 일로 간주하는 한,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한 우리의 믿음과 우리 행위들의 진정한 근원에 관해 어둠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3:21)

이 사순절을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시길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루시가 한 때 찰리 브라운에게 “음, 찰리 브라운 또 낙심했지?” “너의 모든 문제가 무엇인지 아니? 너의 문제는 바로 너라는 거야!”
찰리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 세상에서 내가 그것에 관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루시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충고를 할 수 있는 척 하고 싶지는 않아--나는 단지 문제를 지적했을 뿐이야!”

우리는 찰리의 문제에 대한 답을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

요한복음 3:15은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첫 번째 “영생”입니다. 이 표현이 요한복음에서 사용될 때마다, 늘 현재시제 동사와 함께 사용됩니다. 그래서 영생은 믿는 자들이 지금 갖고있는 어떤 것이고, 아마 “끝이 없는 생명”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생”이 바로 어떤 것인가? O'Day는 신약 주해 성서(the New Interpreter's Bible)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 실존에 일어난 변화를 묘사하는, 네 번째 복음서의 눈에 띄는 비유적 표현들 중에 하나이다(예를 들어 3:36;4:14;5:24;6:27;17:4). 영생을 얻는 것은 이 이상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1:13). “영원한”은 인간실존의 단순한 끝없는 지속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하나님의 끝없는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하는 한 방법이다.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명을 제공받는 것이다.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새로움을 “영생”이라고 말할 때, 종말론적인 기대가 현재적인 것으로 바뀐다. 영생은 신자들의 미래 때까지 미정인 채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현재에서 시작되는 어떤 것이다. [p. 552]

사랑

우리에게 요한복음 3:16이 매우 친밀하기 때문에, 또한 “사랑”이란 단어의 다양한 용법 때문에, 우리가 요한복음에서나 이 절에서의 그 단어의 중요한 의미를 포착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MalinaRohrbaugh는 요한복음에서의 “사랑”과 “미움”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 속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때마다 거의 늘 사용되는 두 단어들이 있다면, 바로 사랑과 미움이다. 하지만 1세기의 지중해 세계에서 그 단어들이 어떤 뜻이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그 세계의 집단 지향성과 그에 따른 외적 표현들 둘 다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용어는 “집단 애착”이나 “어떤 사람에 대한 애착”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애정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이런 애착과 결부된 외적인 행동과 함께, 사랑이 수반되는 내적인 애착감정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미움은 “애착하지 않는 것”(disattachment) “애착이 없는 것”(nonattachment) 이나  또는 “무관심”을 뜻할 것이다. ... [p. 87]

이런 이해를 전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세상에 애착을 갖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사랑은 반드시 내적인 감정이 아니라 외적인 행위들로 이어집니다. 그 애착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하나님의 땅, 가나안에서 바빌론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하려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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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