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 교독 _ 교독문 116번 구주강림 (2)
(인도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회중)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인도자)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회중)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인도자)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회중)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인도자)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회중)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인도자)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회중)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인도자)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회중)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인도자)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회중)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인도자)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회중)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11:1-10)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120 오 베들레헴 작은 골
말씀 _ 마태복음 3장 1~12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대림절 두 번째와 세 번째 주일에는 세례 요한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례요한의 초기 설교를 다루고, 다음 주일에는 그가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께 한 질문들을 다룰 것입니다.(11:2-11)
오늘 마태는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제대로 준비하기를 원한다면, 구유를 들여다보기 보다는 요한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대한 문자적인 번역을 비교해 보면 마태가 강조하고자 하는 사항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1-2b / 마가복음 1:4
그가 나타났다 그가 왔다
세례 요한이 요한 그가
전파하고 있다 세례를 베풀고 있다.
유대 광야에서 광야에서
말하고 있다 전파하고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 왔느니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마태는 세례를 베푸는 요한의 행동보다 요한의 말(즉, 선포내용)을 약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말씀은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4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정확하게 같고, 10장 7절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마태는 선포자로서의 예수와 (요한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여호와는 은혜가 깊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은 많은 요한들과 구분하기 위한 방법이요. 그의 별명이기에 그렇습니다. 성서는 세례 요한을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요(마 11:13), 마지막 나실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눅 1:15-16; 마 3:4).
부친은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인 사가랴요, 모친은 아론 가문의 엘리사벳으로, 모두 주의 계명을 흠 없이 지켰던 의롭고 경건한 이들이었습니다(눅 1:5). 엘리사벳은 주의 모친 마리아와 친척이었고(눅 1:36).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는데, 이때 ‘요한’이라는 이름이 계시되었고, 나실인으로 살 것과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 하였지요.(눅 1:11-18). 선지자 이사야(사 40:3-5; 마 3:3)와 말라기(말 4:5-6)가 요한의 사역을 예언한 바 있는데, 그는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빈 들에서 경건한 나실인으로서 생활했습니다(눅 1:80; 마 3:4).
나실인 [ Nazirite ]
‘구분(구별)된 자’란 뜻. 일평생 혹은 특별한 헌신을 위해 한시적으로 세상과 단절하고 스스로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자를 말합니다. 나실인은 특별히 세 가지를 금해야 합니다. ① 포도나무에서 나는 소산물은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고 ② 시체를 가까이할 수 없었으며 ③ 서원 기간 동안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했습니다.(민 6:1-21).
사사 삼손(삿 13:5),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삼상 1:28), 레갑 자손(렘 35:6), 세례 요한(눅 1:15)이 나실인입니다. 그리고 한시적 나실인은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로마의 디베료 가이사 통치 제15년경에 요단 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사역을 시작했는데(눅 3:1-14), 철저히 자기를 낮춘 채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야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예비시키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마 3:1-11; 눅 1:17; 요 1:31)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나(마 3:13-17; 막 1:9-10; 눅 3:21; 요 1:32),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눅 3:15; 요 1:20),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야로서(요 1:29, 35-36), 그분은 반드시 흥하고 자신은 쇠해야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요 3:29-30).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마 3:3)라는 별명을 지녔으며, 예수님으로부터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마 11:7-14). 그 때, 그는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가 자기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꾸짖은 일로 옥에 갇혔다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마 14:6-12; 막 6:17-28). 그의 죽음 이후에 그를 좇던 제자들 중 일부가 요한의 세례를 계속 전하였고, 그 가르침이 소아시아에까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됩니다.(행 18:25; 19:1-3).
요한의 선포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悔改, repentance)란 무엇인가?
문자적으로 헬라어 메타노에오(matanoeo)는 ‘바꾸다’란 뜻의 ‘메타’와 ‘생각’이란 뜻의 ‘노에오’의 합성어로 “생각(마음)을 바꾸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슈브(shuv)는 진행방향을 바꾸다란 뜻으로 회개는 “사람의 길을 바꾸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가장 훌륭하면서도 가장 간략한 정의는 Richard Jensen이 그의 책 <Touched by the Spirit>에서 회개를 세례와 연관 짓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회개는 자주 “나는 할 수 있다”는 경험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 저의 죄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매우 자주 우리는 회개를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의 태도(way)로 해석한다. 회개가 그런 것일 리가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향하는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로 향하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에, 우리는 우리를 향하시고, 세례에서 우리를 매장하고,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리는 하나님께, 우리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라고 요구한다. 회개는 “나는 할 수 없다”는 경험이다. 회개하는 것은 죽음을 자원하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세례로 시작하신 “자아의 죽음”을 오늘까지 계속하시라는 요구이다.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제 스스로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저를 죽이시고, 저에게 새 생명을 주십시오, 하나님은 세례에서 저를 매장하셨습니다. 하나님, 오늘 다시 저를 매장시켜주십시오. 저를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회개의 언어이다. 회개는 우리의 세례를 갱신하는 매일의 경험이다. [p. 49]
“회개하라”는 명령은 “계속해서 회개하라”는 뜻의 현재시제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한번 통과하는 문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계속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Warren Carter (Matthew and the margins: A Sociopolitical and Religious Reading) 는 회개에 대해 조금 다른 이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회개함으로써, 주의 길(the way)을 준비하고 그의 길들(paths)을 곧게 한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나타내는 은유들이다.(신명기 5:33;예레미야 7:23;마태복음 7:13-14; 로마의 길들[ways]과 도로들[roads]과 대조된다). 요한의 회개의 요청에 대한 사람의 반응 여하에 따라 예수 안에서 명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구원이나 정죄로 경험될 것이다. 때문에 회개하는 것은 삶의 체계나 방법들의 구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p. 94]
우리가 오늘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길의 방향을 돌려 “회개”할 때 진정한 대림절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날마다 “회개”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회개가 바로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 선지자들처럼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길로 왔습니다. “한 소리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친다”는 이사야 40장 3절의 인용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요한과 구약의 선지자들과 연관성은 열왕기하 1:8에 나오는 “허리에 가죽 띠를 맨 털이 많은(난하주에서는 ‘털옷 입은’) 사람”인 엘리야의 모습을 닮은 그의 의복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한은 기근 동안의 엘리야처럼, 그의 음식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였지요. 메뚜기와 석청은 인간 노동의 결실이 결코 아닙니다.
Keener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Matthew)는 광야, 요한의 의복과 음식에 관해언급한 후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요한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 가지고 생활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서 요구하신 유일한 생활방식은 아니었지만, 마태는 하나님께서 어떤 제자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셨고(마태복음 11:18-19), 그들의 생활방식은 모든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도록 도전한다고 믿었다(13:46;비교, 누가복음 3:11;12:33;14:33; 사도행전 2:44-45;4:32-35). [p. 119].
사실, 마태(Matthew, 하나님의 은사)의 이런 사상은 매우 놀라운 지점이 있습니다. 세리였던 그가 “털 옷입은 요한”처럼 살기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를(자신을) 마태라고 했으나 마가ㆍ누가에는 레위(Levi, ‘연합된 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로 처음 헤롯 안디바의 세리(稅吏)였는데, 가버나움 부근의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어, 12사도 중 한 사람이 되어 3년간 예수와 동행했지요. (마태10:3, 마가3:1, 행전1:13).
이런 면에서 마태는 진정으로 회개한 주님의 제자로 보입니다. 그는 그의 생각과 그의 삶을 바꾸어 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각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바뀌어가는 강림절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례는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는 방법(즉, 화재보험으로서의 세례)일까요?
요한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돌들로도 자손을 만들 수 있다는 요한의 언급에는 적어도 그것과 연관된 두 가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첫째, 요한이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말을 했다면, 그는 언어유희를 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들”과 “돌”이라는 단어들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인데, 히브리어에서 아들은 “ben”이고, 돌은 “eben”입니다.
둘째로, 만약 하나님이 돌들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그 때 하나님은 “하늘이 통치하는” 이 사람들에게서 올바른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말을 하지 못하는 무생물 바위들보다 우리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다만 요즘 이 사실에 의심이 드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사람들보다 바위가 훨씬 더 낫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시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대체 왜 '회개'하지 않을까? 라는 깊은 고민의 대답을 이사야의 말씀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6장 9~13절 말씀입니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의의 길이 있습니다. 시온의 대로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땅에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가 모두 무기력과 우울, 좌절과 절망, 쾌락과 그 쾌락의 허무 속에서 헤매이고 있습니다. 시대가 벼랑 끝이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이 오고 있다. 결코 멸망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 '회개'하십시오. 돌이키십시오. 죽음의 길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이사야 6장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임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우찌야(공동번역), 웃시야(개역개정; 히브리어: יאשיהו, 그리스어: Οζίας) 또는 아사랴 (기원전 791년경 - 기원전 739년경 재위)는 분열 유다 왕국의 10대 왕으로 그도 다른 왕들처럼 처음에는 옳은 일을 했으나 점차 교만해져 제사장만의 권한을 무시하고 분향 제단 위의 향을 피우려 성전에 들어갔고 그때 아사랴 제사장이 용감한 사람 80명과 함께 들어가 우찌야 왕을 막고 경고합니다. 그러자 우찌야는 나병이 생겨 평생을 앓았고 별궁에 살며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가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이라고 부르나 우리의 생각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임하셨을 때, 이사야가 혼잣말을 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구나.'
이사야의 마음을 가지길 소망해 보십시오. 부정한 사람,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셨구나!. 이것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태도이겠지요.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사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선지자의 길로 온 오늘의 요한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선포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거기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회개하셨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오셨음을 기억하십시오. 마지막이 있습니다.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찬양 _ 찬송가 134장 나 어느날 꿈 속을 헤매며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