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1장 다 찬양하여라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 _ 교독문 45번 시편 108편
(인도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회중)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인도자)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회중)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인도자)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회중)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인도자)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회중)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인도자)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회중)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다같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1-6)
송영 _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말씀 _ 마태복음 5장 21~37절
마태복음은 아주 긴 본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37절까지이지만 5장의 마지막 절은 48절입니다. 이 또한 6장으로 이어지고 7장에서 끝을 맺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치시는 장면인데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셨을 때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매우 놀랐다. (7:28)
매우 놀라운 말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세상에 전하기 위함이요.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찾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다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찾는 목적은 세상에서 이를 실천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실천하기 위해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하여 7장까지 말씀을 읽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교회에 좋은 말씀을 들으러 온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좋은 말씀, 설교를 들으려 온다고 하시기도 하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말씀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의 태도: 네 가지 사례
오늘의 말씀은 명령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규례, 새로운 율법의 선포라고 볼 수 있지요.
크게 4가지 사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아내를 버리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그런데 네 사례들을 잘 생각해 보면, 이 사례 모두가 모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종교적인 규례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은 6:1-18에서 시작됩니다).
21-26절 성내지 말라
한국사회를 분노사회라고 부른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알수 없는 분노가 확산되고 분노는 전염되어 다시 또 분노를 일으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분노”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당한” 분노, 이 정당한 분노에 사람들은 덩달아 더욱 분노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정당한” 분노와 “정당하지 못한 분노”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분노 때문에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22절은 말 그대로 사람들이 서로 죽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적개심이 없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입니다.
이것은 단지 어떤 모욕적인 말을 하지 말라는 (율법주의의 또 하나의 형태가 될 가능성이 있는)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관한 우리의 생각도 모든 것을 꿰뚫는 보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는 명령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대로 살아가겠다는 자신들의 서약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들이 적개심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여전한 분노와 적개심, 그 분노와 적개심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온 것은 아닌지?
로마에 대한 적개심으로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차별과 고통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온 것은 아닌지? 그들은 자신에게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어떻게 해야할까요?
소외와 적개심을 극복하는 것이 제단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해하라! 이 말씀을 들으면 가장 먼저 누가 떠오르시나요? 혹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시나요? 그런 분들이 많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분노의 대상이 딱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딱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 그 상황 자체가 분노의 대상이고 잘 들여다보면 결국, 자신에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고 합니다. 어쩌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 어쩌지 못하는 나로부터 분노가 시작되어 타자화되어 갑니다.
우리들의 상황은 참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빛”으로 인식하고 고백할 때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자신을 “소금”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분노를 그치고 “화해”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7-30절 간음하지 말라,
십계명의 제6계명이 “간음하지 말라”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가 제5계명이지요.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쉽게 수긍이 갑니다. 어린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쉽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듯 보입니다.
31-32절 아내를 버리지 말라
이어지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말씀은 토라에는 없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9:8~9의 말씀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신명기 24:1-4은 이혼을 허용하는 법이라기보다는 이혼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신명기 24장 1~4절)
인간의 욕망은 그리 쉽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간음하지 말라,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이 두 명령은 우리들, 인간 안에 빚어지고 있는 욕망을 깨닫게 해 줍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은 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하라는 말씀으로 끝이납니다. 헬라어 텔레이오스(teleios)는 성숙하거나 완전한 것, 즉 목표에 도달했거나 목적을 성취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 2절의 말씀과 이어집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여기서 욕망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아야합니다. 우리가 흔히 욕망이라고 부르는 단어와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텔레이오스, 즉 목표에 도달했거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욕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하기 위한 욕망은 끝내 성취해야할 우리들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이 욕망과 구분되야하는 욕망은 더럽고 추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마음 속으로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욕망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거룩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33-37절 맹세하지 말라
“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네가 맹세한 것은 하나님께 다 지키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결코 맹세하지 말아라 ”
우리가 “맹세코 아니야, 또는 맹세코 맞아”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맹세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동시에 진실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맹세한다’는 자신의 행위에 불성실함을 드러내고 무책임한 자기 부정의 태도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 맹세 자체가 이미 허위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그것을 변호하려는 일종의 돌파구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중대한 발언을 할 때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피조물을 가리켜 맹세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습관적인 맹세에서 벗어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진실하길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들음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실천할 때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살아가실 것입니다.
찬양 _ 찬송가 368장 주 예수여 은혜를 내려주사
주기도 (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