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찬 영광의 하나님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136번 성령강림(2)

(인도자) 그 후에 내가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회중)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인도자)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회중)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인도자)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회중)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인도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회중) 누구든지 여화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인도자)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회중)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28-32)

송영 _ 찬송가 4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등록하기

찬양 _ 찬송가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말씀 _ 마태복음 9장 35절 ~10장 8절, 목자없는 양과 일꾼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사람들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픈 것을 고치셨다.”

오늘 말씀은 35절에서 위와 같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36절에서 말씀이 이어지는데 35절이 예수께서 하신 '일'이라면 36~38절은 예수님의 '마음'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이미지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목자 없는 양의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일꾼들을 필요로 하는 풍성한 추수의 이미지입니다.

먼저, 목자 없는 양의 이미지에 관한 Daniel Patte가 그의 책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A Structural Commentary on Matthew's Faith>에서 그는 목자 없는 잃은 양들의 필요를 위해 선포하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선포하는 것과 다르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방향감각, 목적의식, 구체적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부르심에 등을 돌리거나 하나님을 그들의 목자로 모시고 사는 것에 등을 돌린 사람들이다.

둘째, 풍성한 추수의 이미지에서 강조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득가득한 열매를 상상하시나요? 37절의 이미지에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일꾼입니다.

이 두 가지 이미지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하나를 위하여 하나가 필요한 관계입니다.

36절에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고통에 시달리고 의지할 곳 없어 풀이 죽어있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의 연약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돌아보고 보호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상황 때문입니다.

다시, 앞서 나눈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목자없는 양들은 방향감각, 목적의식, 구체적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들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부르심에 등을 돌린 사람들이거나 하나님을 그들의 목자로 모시고 사는 것에 등을 돌린 사람들에겐 ‘목자’가 없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들이 ‘목자’가 없기에 고통에 시달리며 불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은 ‘목자’없음에 마음 아파하시며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목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 없음에 한탄하신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기원전 586년 남왕국 유다의 멸망 후 예수가 오시기까지 400년의 세월, 그 사이 기원전 167년부터 142년까지 셀레우코스 왕조의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적 탄압에 맞서 싸운 마카비 혁명이 있었습니다.

식민지배, 메시아를 향한 오랜 기다림에 지친 그들입니다. ‘목자’ 없었던 긴 세월에 그들은 고통받았고, ‘목자’의 부재는 그들을 더욱 가난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미 우리는 2000년 전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통해 ‘목자’를 알게 되었고 그 ‘목자’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목자없는 양’같은 이들을 보게 될까요? 우리 주변에서 ‘목자없는 양’같은 이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목자없는 양’은 누구일까요?

제가 요즘 고민이 많은 단어가 이 단어입니다. ‘나르시시즘(自己愛, Narcissism)’ ‘나르시시스트’

정신분석학자 스캇펙(Morgan Scott Peck)은 그의 책 ‘거짓의 사람들’에서 악은 나르시시즘과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사탄의 심리 상태의 핵심이 나르시시즘으로 자신의 외모에 도취되어 거울만 바라보고 있는 왕자병, 공주병 정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없는 양’이 아니라 ‘목자가 필요 없는 양’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어느 쪽에 속하든지 고통에 시달리며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목자없는 양’의 상태에서 벗어나십시오.

10장 1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모든 질병과 온갖 아픈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주님은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셔서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가르치고 추수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우리에게 처음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았고, 그의 말씀이 좋았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던 평범한 이들은 이제, 그들이 상상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하라는 구체적인 소명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각 자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을 행하고,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고, 누군가의 삶에서 희망과 안녕의 원천이 되는 힘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권능을 주셨다.”

제자 마태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리 마태, 결코 유대인과 어울릴 수 없었던, 민족의 원수처럼 여겨진 세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마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강림절의 의미입니다.

마태, 그 또한 평범한 이들 중 하나였습니다. 아니 평범하지도 못한 사람, ‘제자’라는 것은 상상도 못해 본 그가 지금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을 다시 생각해 보니 예수님께서 그 때,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0:1-4).

우리도 그때 제자들처럼 구체적인 일들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난주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라. 보라! 나는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우십니까?

네, 저도 그렇습니다. 너무 많은 말, 너무 많은 의와 가르침, 비전과 꿈, 해야만 하는 일, 등등 ‘제자’ ‘일꾼’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8장 20절 마지막 말씀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가 일꾼이요.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예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우리가 ‘목자없는 양’같이 불쌍한 인생을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명의 제자들을,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의 길로 가지 말라.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고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귀신들을 쫓아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어떻게 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까요?

먼저, ‘권능’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일들은 정량평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잘?하라는 정성평가도 아닙니다. 평가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10장 1절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5절부터 긴 당부가 이어지는데 이 말씀은 10장 42절에서 끝이 납니다. 여기서 3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신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그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우리가 일할 때, 주님이 함께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다 아시며, 귀하게 여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아멘.



등록하기

찬양 _ 찬송가 510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