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54번 시편126편

(인도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회중)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인도자)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회중)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인도자)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 보내소서
(회중) 눈물을 흘리며 시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다같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1-6)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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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말씀 _ 누가복음 10장 38~42절, 꼭 필요한 것 한 가지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이 본문 말씀을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고 율법교사의 질문과 사마리아의 비유와 함께 읽어보면 두 본문에서 의미심장한 대조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이것을 계속해서 행하라”는 말을 두 번 듣습니다. (28절과 37절). 헬라어로 현재시제는 계속되거나 반복된 행동을 나타내는데, 그 행함은 마르다의 분주함이나 일(busy-ness)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녀가 “봉사”나 “사역”을 뜻하는 전통적인 단어인 디아코니아(diakonia/diakoneo)를 사용할 때에(40절) 마리아의 “계속적인 들음”(39절)과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이것은 헬라어로 미완료시제로서 과거에 계속되거나 반복된 행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는 많은 일들로 염려하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구나.”

이 말씀을 다시 함께 살펴볼 보면 행함과 들음 사이가 아니라, 즉 마리아의 들음과 마르다의 행함의 대조가 아니라 염려와 염려하지 않음 사이가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의 본문 안에서 다음과 같은 대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 마리아는 예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다.
  • 마르다는 예수 옆에 서 있다(40절의 ephistemai 의 문자적인 의미는 NRSV에서 “나아가”(come)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가까운 곳에 서 있다, 옆에(ephi) 서 있다(stemai)”를 뜻 때가 있지만, 반면에 “서다” 와 심지어 “반대하다”는 개념을 전달할 때고 있다. 마르다는 예수와 마리아가 하고 있는 일에 반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이나 메시지(단수 logos)를 듣고 있는 중이다.
  • 마르다는 예수에게 말한다.

그런데 40절의 “분주하게 되다”(NRSV)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페리 스파오마이(perispaomai),“끌어당기다”는 뜻의 spaomai와 “사방에서”라는 뜻의 peri가 결합된 것입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행함과 들음의 비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다음의 마르다의 이야기는 그녀의 상황을 짐작케 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접대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마음속의 염려와 관련하여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는 헬라어 단어들이 본문에서 세 번 등장합니다. 그 중 첫 번째가 마르다의 말에서 나머지 두 단어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등장합니다.

먼저 마르다는 40절에서 이렇게 예수님께 묻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은 “당신은 신경 쓰지 않습니까?” 또는 “당신은 관심을 갖지 않습니까? 또는 당신은 걱정하지 않습니까?”라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또한 사마리아 사람과 주막 주인이 해를 당한 사람을 돌보는(epimelo) 행위와 관련하여 사용된 단어라는 것에 주목해 보면 마르다는 지금,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봉사”의 중요성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40절의 디아코니아(diakonia 준비하는 일) (NRSV)

40절의 디아코네오 (diakoneo 일하다/봉사하다/섬기다) (NRSV)

이 단어들은 “식탁에서 시중을 들거나” “손님을 대접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후, 이 단어들은 기독교의 봉사나 사역을 뜻하는 전문용어들이 되었습니다. 또 영어에서 “집사”(decon)와 관련된 용어들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봉사가 아닙니다.

행함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행함이, ‘분주하다’는 점입니다.

왜 우리의 “종교적인” 봉사나 사역이 마르다의 매우 염려스러운 바쁜 일이 되는가요?

왜 우리의 ‘돌봄의 행동’이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우리의 관계에 장애가 되는 단순히 바쁜 일이 되는가요?

그리고 마르다가 그랬던 것처럼 왜 우리의 돌봄의 행동이 꼭 누군가의 반응을 기대하는 일이되는가요?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들로 염려하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구나.”

41절의 “염려하다, 근심하다”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들의 백합화에 대한 말씀”(누가복음 12:22-31; 마태복음6:25-34)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염려를 믿음을 갖는 것,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대조하십니다.

41절의 “정신없이 돌아다닌다”는 단어는 “고통당하다,  괴로워하다, 감정적으로 당황하다”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그 자리에서도 고통당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마르다 그녀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율법교사의 질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무엇을 하여야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마르다의 “행함”과 마리아의 “들음”을 대조적으로 보고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며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함께 생각해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요?

우리는 말씀을 혼돈하여 그때그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의 행동과 나의 상황에 그때그때 맞는 말씀을 찾아 위로를 받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을 봉사에 지친 이들, 또는 봉사하지 않고 말씀과 예배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모두 이 말씀에서 선택적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 내가 옳았어.’ 또는 ‘그래 이제 마리아처럼 살아야겠어’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때그때 유리한대로 선택하여 이해되는 책이 아닙니다.

앞서 오늘 본문말씀을 율법교사의 질문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함께 이해해야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너도 그와 같이 행하라.”

‘행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사라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봉사”(섬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들에 관한 그녀의 염려와 근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얘야, 얘 마르다야,” 이렇게 부르시는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시고 마르다를 비판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다시 ‘들음(숨과 쉼)’을 전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섬김과 봉사해야겠지요. 그런데 섬김과 봉사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지요. 우리의 삶이 근심과 염려,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학자 크래덕(Craddock Luke, Interpretation Commentary)은 의미있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마르다를 너무 심하게 비난한다면, 그녀는 봉사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할 수가 있다, 우리가 마리아를 너무 지나치게 칭찬한다면, 그녀는 영원히 거기에 앉아 있고자 할 것이다. 가서 일 할 때가 있고, 듣고 성찰할 때가 있다. 어느 것을 언제 할지는 영적 분별의 문제이다.”

율법교사는 성경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예수님께 제공받았습니다.

마르다는 행하는 것에 관해 매우 근심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마리아의 이야기를 제공받았습니다.

마르다는 대접하고(요한복음12:2),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그녀의 머리칼로 예수의 발을 씻고(요한복음 11:2,12:3~8),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아 있는 장면(요한복음12:2). 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잘 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어렵고

행동하는 것에 근심하면 (예를 들면 기도, 봉사, 헌신, 희생 등등)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어렵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어떠할까요?

우리에게 몇 가지 일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행하라’는 그 말씀을 잊고 ‘행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잊고 ‘봉사’하면 분주해 집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엇을 하든지 평강과 기쁨을 경험하는 삶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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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