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48 시편 106편

송영 _ 찬송가 4장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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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말씀 _ 누가복음 18장 9~14절,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주제를 9절에서는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2명의 대조적인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전통적인 해석에 대한 오류를 경계해야할 것 같습니다. 즉, 우리 자신을 ‘바리새인’과 같지 않다고 여기게 될 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할 때 이 비유가 우리를 비유에서 범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과 동일한 잘못을 범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더 중요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심코 유대인 공동체에 관해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모든 유대인들” 사이를 구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비유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관해 율법적이고, 선민사상에 빠져 있고, “참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구태의연한 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 비유가 “나쁜” 바리새인 대 “착한” 세리의 이분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이로인해 우리가 본문의 말씀에서와 같이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개요

∙서론과 목적(9절)

∙비유(10-13절)

ㅇ 서론

ㅇ 세리의 기도

∙두 이야기의 결론(14절)

ㅇ 의롭다함은 받은 세리

ㅇ (누가복음 14:11과 마태복음23:12의 병행구절에서와 같은) 운명의 반전

 

바리새인

바리새인들은 악당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준수에 헌신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금식을 하고 율법에서 요구하는 곡식(음식)과 동물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소득에 대해 십일조를 합니다. 성전의 기준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착한 남자들”-“의로운 사람들”-이고 이 바리새인들은 일반적인 세리보다 훨씬 더 “착한” 일을 했습니다.

세리들은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반역자들이었고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성전기준에 따르면, 그들은 “나쁜 남자들”-“의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다지 특이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그가 행한 일(그의 금식과 십일조는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넘어섰다) 때문에, 그리고 그가 하지 않은 일(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 그리고 세리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은 것) 때문에 경건한 사람의 모델이 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Luke Timothy Johnson (Luke, Sacra Pagina)는 11절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표현은 어색하다. 어떻게 번역해야할까? 하나는 “그는 자기 자신에게 조용하게 기도했다”고 읽는 것이다. 다른 두 가지 읽기는, “그가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 또는 그는 “그 자신에 관해 기도했지만 세리를 바라보는 눈을 갖고 기도했다!”고 읽는 것이다. [p. 271]
우리에게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비슷한 고대의 기도들의 기록들이 있고, 이런 기도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하는 자랑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탈무드에 나오는 다음의 감사의 기도는 랍비들이 연구의 집(배움의 집)을 떠날 때(또는 들어갈 때)에 한 기도였다.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주께서 저를 베스 하-미스라쉬(연구의 집))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있게 하심에, 그리고 저를 거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않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제가 일찍 일어나고, 그들이 일찍 일어나지만, 저는 토라의 말씀을 위해 일찍 일어나고, 그들은 잡담을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노동을 하고 그들이 노동을 하지만, 저는 노동을 하고 보상을 받지만, 그들은 노동을 하고 보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달려가고, 그들이 달려가지만, 저는 미래 세상의 생명을 위해 달려가지만 그들은 파멸의 웅덩이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b. Ber. 28b (Soncino 1: 172), Bernard Brandon Scott의 <Hear Then the Parables>에서 인용함.]

 

결국,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다르게 된 것은 성전이라는 “공간” 때문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있는 ‘세리’를 보았고 바리새인은 세리를 ‘의식’하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세리

세리는 바리새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이여,”라는 동일한 간구로 그의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그는 신약성서에서 단 2회만 나오는 단어인 hilaskomai(“불쌍히 여기소서,” 누가복음 18:13, 히브리서2:17)를 사용합니다. Lowe & Nida에서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1) "용서하다" - 여기에서 용서가 성취되는 도구나 수단이 강조된다.

(2) 그 사람이 도덕적인 범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연민”과 관심을 보이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세리의 네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하고 있습니다.

(1) 그가 멀리 서서,

(2) 그가 눈을 들을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3) 다만, 회개의 표시로서 그의 가슴을 치며,

(4) 그가 자비를 위해 소리쳤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누가복음 5:32)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7).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18:13)

 

우리는 “죄인”일까요?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예배하고 있나요?

우리가 세상에서 바리새인처럼 살아가고 성전에서 세리처럼 기도할 수 있을까요?

 

결론

“의롭다함을 받다”는 (dedikaiomenos) 완료수동형분사입니다. 완료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이 현재에 계속되고 있는 어떤 일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그가 “의롭게 되었다”나 현재시제로 “그가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동형 문장은 능동형문장의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잭이 집을 세운다”는 능동형 문장은 “집이 잭에 의해 세워 진다”는 수동형 문장이 됩니다.

14절에서 수동형 문장은 “세리가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고, 능동형 문장은 “하나님께서 세리를 의롭게 하셨다”이지요.

서론에서 “자기를 의롭게 하는 것”(9절)과 대조적으로, 이 문법에서는 하나님이 세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리가 그 자신을 위해서 하는 어떤 일이 아닙니다.

그는 성전에 “죄인”으로 왔지만,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유대인의 민간설화라는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도에 대한 비유가 있답니다.

옛날에, 임종 직전의 한 랍비가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 공동체는 하늘의 재판장에게 사형선고를 연기해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도시 전체에 금식의 날을 선포했다.
모든 회중이 참회와 기도를 위해서 회당에 모인 바로 그 날에 도시의 주정뱅이가 술을 마시기 위해 선술집으로 갔다. 다른 유대인이 그가 술을 마시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오늘이 금식일임을 알지 못하느냐?, 술 마시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랍비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회당에 모여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그를 꾸짖었다.
그래서 주정뱅이가 회당에 가서 이렇게 기도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우리 랍비의 건강을 다시 회복시켜주셔서, 제가 술을 마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랍비는 회복되었고, 기적으로 여겨졌다. 랍비가 그 기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을의 주정뱅이를 120살이 될 때까지 지켜주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을 때,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는 그의 기도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 불어넣었습니다!” [p. 16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며 말씀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이 일을 통해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기대합니다.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세리를 통해 알게 된 ‘기도’는 우리가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모든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가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에 대한 오해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 ‘죄’를 ‘범죄’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모두 세리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범죄 (Crime):

기준: 국가가 제정한 법률, 특히 형법을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성격: 사회적, 법률적 개념이며, 법적 처벌(벌금, 징역 등)의 대상이 됩니다.

 

-죄 (Sin):

기준: 주로 종교적, 윤리적 또는 도덕적 기준을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나 율법에 미치지 못하거나 어긋나는 모든 행위, 생각, 상태를 포괄합니다.

성격: 종교적, 신학적 개념이며, 영적인 처벌(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등)의 문제로 다루어집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18:13)

‘죄인’은 헬라어로 ἁμαρτωλός (하마르톨로스, hamartōlos)로 '죄'를 뜻하는 명사 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 hamartia)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여기서

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 "과녁에서 빗나가다", "목표를 맞추지 못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목표, 과녁)에서 벗어난 상태나 행위를 의미합니다.ἁμαρτωλός (하마르톨로스): '하마르티아'를 저지르는 사람, 즉 과녁을 빗나간 사람 또는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다르게 설명하면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서 벗어난 상태가 ‘죄인’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늘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발견됩니다. 바로 우리가 우리의 ‘기준’과 ‘뜻’을 늘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만나는 지점이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러한 태도를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그가 멀리 서서,

(2) 그가 눈을 들을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3) 다만, 회개의 표시로서 그의 가슴을 치며,

(4) 그가 자비를 위해 소리쳤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툴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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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539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