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30번 시편 67편
(인도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회중)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인도자)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회중)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인도자)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회중)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인도자)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회중)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인도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회중)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1-7)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150장 갈보리 산 위에
말씀 _ 누가복음 20장 27~38절,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여 누가복음 19장 28절에서 도착하셨습니다.
-문맥-
종려주일 사건들(19:28-40)
예루살렘에 관해 우시는 예수(19:41-44)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예수(19:45-46)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다(19:47-48)
예수의 권위에 대한 질문(20:1-8)
악한 농부들의 비유(20:9-19)
세금에 관한 질문(20:20-26)
부활에 관한 질문(20:27-40)
다윗의 자손에 관한 질문(20:41-44)
서기관들에 대한 비난(20:45-47)
과부의 헌금(21:1-4)
묵시문학적 강론(21:5-36)
다가오는 전쟁과 박해들(21:5-19)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고(21:20-24)
인자의 오심에 대한 예고(21:25-36)
성전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의 결론(21:37-38)
----------------
19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여 그 말씀이 21장까지 이어지고 마지막 결론 부분이 37~38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시치고 밤에는 감람산이라고 불리는 언덕으로 나가서 지내셨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성전에 모여들었다.”(눅21:37~38)
1.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2. 그는 매일 가르치셨다.
3. 예수의 가르침에 두 가지 반응들이 있었다.
a.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고자 했 다”(19:47)
b.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였고”(19:48), 그들은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21:38)
이러한 문맥에 오늘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좁은 문맥의 측면에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유대종교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요, 그리고 이 갈등은 네개의 질문들과 이어지고 있습니다.
1. 대제사장,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의 권위에 관해 질문하다.(20:2)
2. 그들(19절의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에게 세금에 관해 질문하다.(20:22)
3. 사두개인들(v. 27)과 서기관들(39절)이 예수에게 부활에 관해 질문하다.(20:33)
4. 예수께서 다윗의 주이신 메시아에 관해 질문하다.(20:41)
오늘 말씀에서 등장하는 사두개인은 누가복음에 언급된 유일한 본문입니다.
사두개인들
사두개인들은 (Sadducees) B.C. 2세기경 하스모니안 왕조 때 사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다수 제사장들에 의해 형성된 유대교의 당파 중 하나로, 종교와 정치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일종의 정치 집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동시에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로마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며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바리새파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성문화된 율법(모세 오경)만을 받아들이고 구전(장로의 전승)은 거부하였으며, 부활이나 천사나 영생, 영혼 등을 믿지 않았습니다.(막 12:18; 눅 20:27; 행 23:8). 그러나 납세 문제 등에 관해서는 긍정적이었는데 이들은 ‘물질주의자’ 혹은 ‘현실주의자’로 세례 요한(마 3:7-8)과 예수님께 비난 받았습니다. (마 16:6-12).
옥스퍼드 대학에서 발간한 성경 안내서는 율법에 대한 사두개인들의 전통적인 관념을 다음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은 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들은 만약에 율법에 순종하고,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하고 당연히 해야 할 배상을 한다면, 그 때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었다. …
사두개인들은 부와 그들의 지위, 오직 이 세상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두개인들이 오직, ‘이 세상’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그들이 결코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다시 살아날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왜냐하면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전에, “영원한 생명”은 가문의 토지 소유권을 계승하는 상속자들(아들?)을 생산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만약 남편이 아들을 생산하기 전에 죽는다면(신명기25:5), 그의 형제의 가문을 잇도록 자손을 생산하게 할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그 (남편)의 형제의 책임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관습이 모세의 율법에서 나왔다며 그들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 묻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활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그들이 믿지 않는) 부활 이후의 삶이 부활 이전의 삶과 동일한 것이라고 가정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십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
먼저, 예수님의 그들의 질문에 “이 세대”와 “저 세대”사이를 구분하셨습니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구분을 한 적이 있었지요.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16:8)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으니라 하시니라(18:29-30)
그리고 누가가 제시하는 세대들에 대한 대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대의 자녀들 대 빛의 자녀들
∙이 세대의 소유와 관계들 대 다가올 세대에서 영생
∙이 세대의 자녀들 대 저 세대의 자녀들=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
사두개인들은 부활한 삶을 이 땅에서의 삶과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고 그들의 ‘생각’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누가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다시 살아나는 삶에서조차 그들은 “소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 아내논쟁에 대하여 신학자 Culpepper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 시에 시집장가 가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은 자유하게 하는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한편 결혼에서 평생 동안 친밀감과 동반자 관계를 누린 사람들은 이런 관계가 부활에서 끝나게 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35절의 말씀을 해석하는 하나의 접근법은 이 진술이 결혼을 여자에 대한 남성의 권리와 남성부양을 위한 여자의 권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로 간주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이런 해결책이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그러므로 긍정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결혼 제도를 비롯하여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능력(capacity)을 지닌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실 것이다. 성서적인 가르침은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 안에, 또는 인간 존재에 대해 천성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불멸인 것은 없다. 만약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은총)이다. [p. 390] 만약 결혼과 가족이라는 하나님의 선물들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느낌을 갖고 있는 우리가 부활에서 그것 모두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 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관계에서 경험하게 될 가장 좋은 것보다 매우 압도적으로 우월한 것이 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 될지는 내게 신비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대를 벗어나 제 세대의 아들들로, 빛의 자녀들로 영생의 신비를 바라보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반응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일으켜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를 언급한 대목에서 이미 밝혀 주었다. 거기에서 그는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사라고 했다.”
하나님이 가시덤불에서부터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3:6)이라고 선언하셨을 때, 그들은 모두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죽은 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만약 그들이 무(nothing)가 되었다면, 그 때 하나님은 “나는 무의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셨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것(누구의)의 하나님이라면, 그 사람들은 (우리가 보기에 죽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살아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게 됩니다.
누가는 16:13에서 부자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나사로를 볼 때, 아브라함을 살아있는 존재로 묘사하기도 했지요.
죽은 그들도 살아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오늘 말씀은 논쟁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게 되었는지는 성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모두 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 세상’은 신비로 두고 ‘이 세상’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부활’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저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살펴보아 할 부분은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자가 되었다는 ‘부활’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의 확장 부분입니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35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38절)
38절의 ‘살아있는자’와 ‘살았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단어는 모두 ‘생명’ <조에>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1. ζώντων (zōntōn)
어근: ζάω (zaō) → “살다(live), 생명을 가지다, 존재하다”
형태: ζώντων = 현재 분사, 남성 복수 속격 (of the living)
직역: “살고 있는 자들의 (것)”
의미: 단순히 ‘숨 쉬고 있는 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존재,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자들을 의미함.
즉, “산 자의 하나님”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계속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2. ζῶσιν (zōsin)
동사 **ζάω (zaō)**의 현재 능동 직설법 3인칭 복수
“그들은 산다(live)”
“πάντες γὰρ αὐτῷ ζῶσιν” =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는 살아 있다”
**“하나님께는”**이라는 표현(αὐτῷ)은 하나님의 관점을 나타내므로,
인간의 시점에서는 죽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시점에서는 생명 안에서 존재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생명이 넘치는”(lively)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면서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이 삶을 지치게 하기보다는 생명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단지 죽은 사람들이나 우리의 미래 삶을 긍정하는 것 이상을 뜻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이 시대에, 오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쳐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이다.”(20:38)
하나님께 우리 모두가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찬양 _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