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6장 목소릴 높여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 교독 _ 교독문 115번 구주강림 (1)

(인도자)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회중)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인도자)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회중)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인도자)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회중)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시62:10-12)
(인도자)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회중)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인도자)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회중)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다같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눅3:4-6)

 

송영 _ 찬송가 5장 이 천지간 만물들아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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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말씀 _ 누가복음 21장 25~36절, 너희 속량이 가까이 왔다.

대림절이 시작되면, 온순한 당나귀와 양이 등장하는 평화로운 성탄 장면처럼 사랑받는 이미지와 성탄절 아이콘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의 복음서 독서는 우주적 대재앙, 종말론적 긴박함, 다가올 위험에 대한 경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작이 강렬하다 보니, 어떤 이들은 대림절을 건너뛰고 단순히 아름답고 이상적인 크리스마스만 즐기고 싶어 할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생기지요.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1:25-36은 우주적이고 난해한 구절들, 종말론적인 긴박함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 메세지는 희망의 메세지입니다. 혼돈과 불확실성으로 향하는 세상 한 가운데서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려주고 있습니다. (28절). 요즘같은 불확실한 시대, 경쟁도 가능하지 않은 무기력한 시대에 오늘의 메시지 ‘속량’이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누가복음 21장 25절 말씀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징조가 있을 것이다.”

“…에는 징조가 있겠고.”

누가만 이 부분에서 “징조들/표적들”(signs)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단어가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7절 단수-마가복음과 동일)라는 질문과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니”(누가복음에서만 11절에 나옴)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2:12).

다른 편으로 징조들은 수 세기 동안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징조들은 우리 주위에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Luke Timothy Johnson (Luke, Sacra Pagina)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론의 이 세 번째 부분으로의 전환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21장 25절에서 7절의 “징조”란 용어를 반복하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하지만 지금 묘사되고 있는 것들은 신자들의 과거의 일이나 도시의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심판 때의 사람들의 보편적인 경험에 관한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누가는 “민족들 사이에서의 불안과 혼란”(25절), 즉 “사람이 거주하는 세상”(oikoumene, 26절)과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35절)에게 임할 일들에 대해 말한다. 만약 이 암시들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면, “징조들”에 대한 누가의 설명은 전쟁과 혁명(10절), 심지어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하늘의 불길한 현상(11절)이나 도시를 에워싸는 군대들(20절)에 대한 것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일월성신에서 일어나는 우주적인 사건들(25절), 바다의 소동들(25절), 하늘의 권능들의 흔들림(26절)에 대한 것들이다. [p. 330]

 

“일월성신에서 일어나는” 이 징조들은 다음과 같은 선지자들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가 돋아도 어두우며 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이사야 13장9-10절)
“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을 어둡게 하며 를 구름으로 가리며 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스겔 32장 7-8절)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가 어두워지고 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요엘 2장 30-31절).

 

이 하늘의 징조들은 오심을 기대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꾸로 예언자들의 말의 성취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약속과 성취는 누가복음 전체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지요.

종말의 다른 말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놀라운 부분은 “사람들”과 “너희”의 대조되는 모습에 있습니다. 징조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모두에게, 그런데 발생하는 일에 대한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이다.”(26절) 하지만 너희는 “일어나서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구원)이 가까웠느니라."(28절, 누가복음에만 나옴).

20절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게 될 때에, 그것의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는 말을 듣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로서가 아니라, 종말이 가깝다는 징조로서 이해되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28절에서 우리 속량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속량”(redemption)을 뜻하는 단어 apolytrosis는 몸값을 지불하고 누군가를 석방하거나 자유롭게 한다는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바로 “속량”입니다. 예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가 가장 큰 선물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속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량’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는 ‘속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지금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가 우리를 속박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박해’와 ‘공포’와 ‘두려움’, ‘불안’도 우리를 속박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32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잠에 짓눌려 있다가(weighed down with sleep), 온전히 깨어난 후에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9:32). 변화산에서, (잠에) “짓눌린” 것과 예수의 영광을 보게 된 사이의 대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짓누를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걱정과 우리 자신의 쾌락입니다.

재물과 삶의 향락과 더불어 “걱정들”이나 “염려들”(merimna)이, 말씀이 심은 것을 질식시켜 그 열매가 성장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8:14)

쾌락과, 걱정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쾌락을 이제는 ‘행복’이라고 부리고 싶습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쾌락’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는 ‘하고싶은 것’, ‘좋아하는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걱정’과 ‘염려’ ‘불안’ ‘두려움’이 파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염려’와 ‘불안’은 그 ‘쾌락’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데 결코 이 쾌락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세대를 우리는 마주하고 있습니다.

왜 포기하지 못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쾌락’을 쫓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공부도, 일도, 사랑도 ‘쾌락’을 얻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이 ‘쾌락’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돈’입니다. 이 돈이 곧 ‘쾌락’이 되었으니 이는 ‘쾌락’의 의미조차 왜곡된 현실인 것 같습니다. (물론, 돈은 매우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돈'에 관하여 함부로 생각하거나 그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쾌락은 한국어 표준국어대사전 및 기본 한국어 사전에 따르면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한자: 쾌(快: 쾌할 쾌), 락(樂: 즐거울 락)

의미: 몸과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감정이나 상태.

쾌락은 영어로 번역하자면 Pleasure, Joy, Delight, Gratification 등 입니다.

"It was a pleasure to meet you." (당신을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여기서 ‘돈’이 없는 쾌락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저 당신을 만나서 좋은 상태가 ‘쾌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이 없으면 사람을 만나 즐거울 수가 없지요.

쾌락이 아니라 쾌락주의는 Hedonism이 됩니다. Hedonism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ἡδονή (hēdonḗ), '즐거움', '기쁨', 또는 '쾌락 (pleasure)'으로 이는 키레네 학파 (Cyrenaics)에서 나온 단어이지요. 아리스티포스 (Aristippus, 기원전 435년경 ~ 기원전 356년경)는 순간적이고 감각적인(육체적인) 쾌락이 최고선이며, 인간 행위의 유일한 목적은 당장의 쾌락을 얻고 고통을 피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적극적이고 순간적인 쾌락을 강조했습니다.

이후 에피쿠로스 학파 (Epicureans)가 등장하는데 에피쿠로스 (Epicurus, 기원전 341년 ~ 기원전 270년)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방탕한 쾌락과는 거리가 먼, 정적(靜的)이고 지속적인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에피쿠로스에게 진정한 쾌락은 '신체의 고통이 없고(Aponia)' '영혼의 불안이 없는(Ataraxia, 평정심)' 상태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과도한 욕망 충족이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고 보았기 때문에,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과 우정을 강조했습니다.

이 두 가지 철학적 사유가 ‘공리주의’에서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쾌락’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사회가 되기를 진정 함께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쾌락’을 쫓지 않으면 발생되지 않는 걱정과 염려,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상관없는 두려움과, 불안도 있습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11-12)

세상과, 삶 안에 낮과 밤이 공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세상과 시대 그 속에 홀로 있는 한 인간에게 엄습해오는 ‘불안’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보이지 않는 앞,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에게도 ‘불안’이 있습니다. 한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가는 이들에게서 일어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 창조 질서 보전을 위해 살아가는 위해서는 ‘두려움’에 맞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그 누구도 이 ‘시험’을 겪지 않을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성서는 말합니다. 그때가 말씀이 역사하시는 때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그날을 향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묵시문학’의 지혜입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이다.”(26절) 하지만 너희는 “일어나서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구원)이 가까웠느니라.“

“짓눌리다”의 반대말은 ‘깨어있거나 조심하다’입니다. 거기엔 항상 기도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기도하는 사람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게 될 말씀의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싹이 나는 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운 것을 아는 사람들이 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방탕하지 않고, 술 취하지 않으며, 생활의 염려로 마음을 둔하게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불확실해도 예수께서는 그의 다시 오심이 지속적인 구원과 정의와 속량과 치유를 가져오게 될 날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변화시킬 강력한 힘입니다.

이러므로 대림절기가 ‘속량’ 안에서 우리들의 머리를 들고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는 절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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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111장 귀중한 보배합을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