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8장 거룩거룩거룩 전능하신 주님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125번 사순절(2)

(인도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회중)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인도자)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회중)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인도자)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회중)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1-3)
(인도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회중)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인도자)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회중)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인도자)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회중)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인도자)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회중)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인도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회중)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8-11)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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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말씀 _ 누가복음 13장 31~35절, 오늘도, 내일도 가야하는 길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 9장 51절 이후에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여정 중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9:51).

이 여행은 예수님께서 19장 28절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그 자신이 있어야할 곳을 향하여 길 위에 오르셨습니다.

누가복음 13:31-33 제 삼일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31a절)는 이 본문을 앞 부분과 연결합니다. 13장 23절에서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받을 자가 얼마나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2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24절).

그리고 예수님은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28-30절).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이렇게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곤 이렇게 전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바리새파라고 불리웁니다. 히브리어 ‘페루쉼’에서 유래한 말로서 ‘분리된 자’, ‘분리주의자’, ‘구별된 자’, ‘거룩한’, ‘신성한’, ‘배타적인 신앙의’라는 뜻이지요. 율법을 지극히 세심하게 지키면서 불결한 것과 부정한 자들(세상,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해 나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두개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교의 3대 종파 중 하나입니다.(마 12:2; 행 15:5; 빌 3:5).

사실, 바리새파의 시작은

B.C. 2세기경 엄격한 율법주의를 고수하던 ‘하시딤’(Hassidim)이 마카비 혁명 기간 동안 수리아의 헬라화 정책에 대항하여 조직된 집단입니다. 즉, 유대인들을 헬라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수리아의 정책에 반대하여 선민(選民)으로서 성결하게 살자는 경건주의 운동이었습니다. 헬라주의 타파, 율법 중심의 신앙 회복, 경건주의적인 생활, 유대교 부흥 등을 중심 모토로 하셨으나 예수님 당시, 그들에겐 경건의 모양만이 남아있었습니다.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장 5절)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1. 그들의 이야기를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적잖이 협박하며 그 땅을 떠나라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 그들이 사실 그대로 예수님께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헤롯이 죽이려 하고 있으니 피하라는 의미인 셈이지요.

어떤 해석을 해야할까요?

먼저 바리새인들의 협박이라면, 우리들의 경건한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을 수 있음에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둘째 바리새파 안에도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변화, 우리의 소망이 여기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사도행전23:6).

떠나라는 바리새인들의 이야기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들을 다 고쳐주다가 삼일째 되는 날에는 내 목적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나는 계속 가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흘 때 되는 날에”(32b절). 누가는 자주 “제 삼일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9:22;18:33; 24:7, 21, 46; Acts 10:40).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은 서술형 “이룰 것이다.”로 이어집니다. 일을 끝내다, 완성할 것이다. 나의 목적에 도달할 것이다. 등등 다양한 번역이 가능한 이 문장은 요한복음 19장 30절 말씀과 연결하여 정리해보면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가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고 있으시며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그가 세상에 오신 이유를 깨달은 순간, 우리의 구원은 이미 그 순간에 이루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십자가 위, 예수님의 죽음은 어제 우리가 묵상하였던 두가지를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무엇을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순례를 자주 간다고 해서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게 되는 걸까요? 그렇게 순례를 해도, 기도를 해도, 말씀을 들어도, 사순절을 지켜도 거룩해지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왜?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살기에 힘쓰라” “죽는 법을 익히라”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로 결심하는 이유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 저는 이 말씀을 다시 읽으며 제 삼일에 목적하는 바를 이루실 것이라 말씀하시며 오늘과 내일,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들을 다 고쳐주시겠다는 말씀에 ‘부모와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내 자녀를 떠나야 한다면? 아마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요?

우리사회는 지금, 부모와 자녀, 가족 간의 갈등으로 서로의 마음을 살펴보지 못하고, 본질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함께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설명하면 모두, 이해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누가복음 13;34-3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슬픔을 쏟아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운명을 더욱 슬퍼하실 것입니다. (19:41-44, 21:20-24, 23:27-31)

 ‘예루’(터, 기초)와 ‘살렘’(평안, 평강)의 합성어로서 ‘살렘(평화)의 기초’, ‘평강의 소유’란 뜻이 됩니다.

성경에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브라함 시대(B.C. 18세기경) 살렘 왕 멜기세덱이 먹을 것으로 아브라함을 대접한 때입니다.(창 14:18).

다윗을 이은 솔로몬 왕이 다윗 성 북쪽 모리아 산상에(창 22:2) 성전을 건축했고, 또 크고 화려한 궁전 등 수많은 건축물들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되었고 솔로몬이 죽은 후 왕국은 남북으로 분리되었으나 예루살렘은 여전히 남유다의 수도로서 명맥을 유지하며 이스라엘, 다윗의 왕국을 상징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 다윗의 성이고, 하나님의 도성의 원형이며 예배의 장소이고, 유대인의 순례의 목적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34b절)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35a절).

주전 587년에 하나님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게 하셨습니다. 많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소수의 남은 자가 돌아오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도시를 다시 세웠습니다. 추방은 그들에 대한 심판이었으며 동시에 그들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십자가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통곡하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23:28-30).

누가가 이 복음서를 쓸 당시에,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주후 68년에, 유대의 반란에 대응하여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것이고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불리게 될 때에,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그 임무를 넘겨줄 것이고, 티투스는 주후 70년에 유대인의 방어벽을 뚫고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그 도시의 주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을 것입니다. 나중에 주후 132-135년의 두 번째 반란 이후에 하드리아누스가 그 도시의 잔해를 뒤엎어버리고 그 지대에 로마인의 도시를 세우고 거기에서 유대인들을 금지하게 될 것입니다. (Myers,571).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 집은 너희에게 황폐한 채로 내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 분이 복되시다.”하고 말할 때 까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 그 다음 날에도 그 길을 계속 가실 것이고 다른 길로 가지 않으십니다. 그 길을 걸으셔서 마침내 제 삼일에 다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순절,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오늘도, 내일도 계속 가야합니다. 그 길을 걷는 자만이 마침내 제 삼일에 이루시는 거룩한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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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