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2장 만유의 주 앞에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20번 시편33편
(인도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회중)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인도자)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회중)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인도자)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회중)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인도자)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회중)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1-8)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말씀 _ 누가복음 15장 1~10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누가복음 15장은 여섯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a. 비유들에 대한 소개(15:1-3)--병행구절이 없음
b. 양의 비유(누가복음15:4-6;//마태복음 18:12-14.//도마복음 107:1-3
c. 비유에 대한 결론(누가복음15:7)--병행구절이 없음
d. 동전의 비유(누가복음15:8-9)--병행구절이 없음
e. 비유에 대한 결론(누가복음15:10)-병행구절이 없음
f. 두 아들들의 비유(누가복음15:11-32)-병행구절이 없음
이 말씀들은 지난주의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14장과 16장에서 사회의 주변인들, 즉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그리고 맹인들”(25;24;비교, 25:32;26:30)을 집으로 환영하는 일과 누가복음 15:1-32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기된 중요한 질문을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두고 하늘에서 기쁨이 더할 것이다.(15:7)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15:10)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즐거워하고 기뻐해야하는 것은 네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어버렸다가 되찾았기 때문이다. (15:32)
과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하늘의 기쁨에 참여하고, 축하자리에서 그들의 회복을 축하하면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환영하게 될까요?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주목할 만한 비유들을 통해 “누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누가복음 13장 10절에서 17장 10절이라는 더 큰 단락 안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 단락에는 제자도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종종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지도층은 다른 사람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메시아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신실한 남은 자들”의 반열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와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늘에 오르심을 아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어야하며 그 대답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지게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정답을 들고 있지만 쓸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우리가 수능을 보고 있다면 우리가 정답을 알고 있는데 답을 쓰기를 망설이게 될까요? 너무 성적이 잘 나올까봐? 너무 쉽게 답을 알고 있어서? 생각보다 내가 아는 것이 없는데 양심상 정답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요?
회개를 다시 정의하기
오늘의 본문 말씀은 두 개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 모두 회개에 관한 진술로 끝나지만, 회개는 이 비유들의 요점이 아닙니다. 그 양이 “나쁜 양”이거나 그 동전이 “죄를 지어서” 그들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암시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Dick Jensen (Preaching Luke's Gospel)은 Kenneth Bailey의 책 <Finding the Lost: Cultural Keys to Luke 15>에서 회개의 새로운 정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행위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우리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회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으셨다는 현실(reality)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잃어버린 자’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p. 169]
“양은 찾음을 당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회복의 부담(의무)은 양이 아니라, 양들을 찾으러 간 목자에게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대가를 치른다. 우리는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그 사랑의 제공을 받아들인다. 그 받아들임 안에 회개에 대한 예수의 정의가 있다.” [notes from the Professional Leaders Conference of the Northern Illinois Synod, September, 1994]
파티 초대!!!
회개에 대한 정의와 관련해서, 누가복음 15장 전체의 메시지인 “나와 함께 기뻐하자”는 구절을 함께 생각해 보십시오! 6절과 9절, 5절, 7절, 10절, 그리고 32절의 “기뻐하다”와 “기쁜”이란 단어를 회개와 함께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인간 노력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찾는 자에 의해 발견되는 경험에 더 가깝다. 그리고 회개는 슬픈 양심의 가책보다는 새 생명의 선물로 인한 기쁨에 있다” [Tannehill (Luke) p. 238]
1-2절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는 죄인들로 인해 예수와 함께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수군거리고 있습니다(diagogguzo, 표준새번역 “투덜거린다”).
동일한 단어가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가실 때,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19:7).
비슷한 관련 단어(gogguzo)가 예수님께서 레위의 집에 가셔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실 때에 불평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 사용되고 있습니다(5:30),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의 “불평”은 모두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친교, 식사자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Green (The Gospel of Luke)은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2b절은 바리새인들과 법률 전문가들이 보는 예수의 문제점을 잘 요약하고 있다. 왜냐하면 누가에 따르면,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인정된 규범과 관련한 예수의 감성의 결여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무시가 명백하게 표출된 것은 식탁에서였기 때문이다. 예수의 적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사회-종교적 경계들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도구들서의 식탁의 중요성을 계속 무시하신다. 참으로 현재 사건에서, 그들이 예수를 비난하는 것은 -5:29에서처럼 죄인들을 초대하고- “죄인들”과 같이 음식을 먹을 뿐만 아니라 환대를 죄인들에게로 확장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아웃사이더들, 비천한 처지에 있는 이 부정하고 하찮은 사람들을 향해, 마치 그들을 용인하는 것처럼, 마치 그들의 친척인 것처럼 행동하셨다. [p. 571]
누가복음 15장 전체의 세 비유 모두에서 대답이 제공되지 않는 질문이 있습니다.
목자의 친구들과 이웃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은 그와 함께 기뻐할 것인가?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여자의 친구들과 이웃들은 그녀와 함께 기뻐할 것인가??
맏아들은, 그의 동생과 음식을 같이 먹는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것인가???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에 등장하는 목자와, 여자와 아버지는 분명, “기뻐할 것입니다.”
앞서 누가는 우리에게 “누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질물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정답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정답이 맞는 정답이셨나요?
저는 정답을 알고 있지만 쓰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알고 있지만 대답을 쓰지 못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한 그 정답이 진정 맞는 정답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Culpepper (Luke, New Interpreter's Bible) 는 이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비유 모두에서 기뻐함에는 축하가 요청된다. 축하에 대한 언급은 요점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일수도 있다. 양도, 동전들도 회개할 수 없다. 그러나 비유의 목적은 “죄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요청하는데 있지 않고, “의인들”에게 축하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데 있다. 축하에 참여할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관계가 공로에 근거한지, 아니면 자비에 근거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죄인이 회개할 때 천사들과 함께 축하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총에서 배제한다. [p. 298]
5:29-32의 식사장면에서처럼, 오늘 본문도 “죄인들”과 “의인들”은 풍자적인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인들은 회개하는 자로, 의인들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필요를 깨닫지 못하는 자로 제시됩니다.
어제가 추석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추석은 모든 마을공동체가 송편을 나누어 먹으며 그간의 시름을 내려놓고 가난한 이들과 병든 자들 모두와 함께 음식을 나누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전통 중 하나가 공동의 식탁자리는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교회마다 자리를 잡은 점심문화입니다. 그리고 점심문화는 본래의 정신이 훼손된 채, 너무도 많은 문제들과 코로나19이후 문화의 변화로 인해 이제, 교회에서 사라지는 문화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여러분이 생각한 정답이 맞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누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까요?”
여전히 정답을 알고 있지만 쓰기가 어려우신가요?
하늘에서의 기쁨 그리고 땅에서의 기쁨
“거기에 있다.” 죄인이 회개 할 때, 그 순간, 하늘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그 때, 땅에서도 그로 인해 기쁨이 있게 될 것인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천사와 아버지가 기뻐할 때,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도 그 기쁨에 참여하는 자가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510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