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61번 시편 142편
(인도자)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회중)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인도자)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회중)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인도자)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회중)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인도자)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파난처도 없고
(회중)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인도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회중)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인도자)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회중)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인도자)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회중)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1-7)
송영 _ 찬송가 4장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말씀 _ 누가복음 16장 19~31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누가복음 15장 끝의 재산을 낭비한 아들의 비유 다음에, 16장은 1절과 19절에서 “어떤 부자가 있었다. …”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지난주 말씀에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6장의 처음부분에서 청중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14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누가는 이들을 ‘돈을 사랑하는 자들’로 묘사된 바리새인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웃었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를 향해 콧방귀를 뀌다”입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겐 어떻게 들리시나요?
위로와 평안?
찔림과 당혹스러움?
하나님께서 우리릐 마음을 아신다는 이 말씀은 가난한 여인의 헌금을 떠올리게 합니다.(누가21:1~4)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
A. 비유의 1부-내레이션 (19-23)
B. 비유의 2부-대화(24-26)
C. 비유에 추가된 구절들(27-31절)
-— A. 내레이션(19-23절)
“어떤 부자가 있었다”로 시작되는 지난주에 이은 두 비유에서 “주인공”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 즉 부정직한 청기기, 가난하고 굶주리고 아픈 나사로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 두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의 밖에 있는 사람들로 간주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이나 고대세계이든 재물을 덕행과 동일시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은 재물로 보상받기를 기대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재물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재물을 얻고 나서 착하고 (멋있고, 열심히 일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고대세계에서 재산, 덕행, 남자다움과 같은 개념들이 사회적 엘리트들의 지위를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는 부자가 착한 사람이라는 개념에 직접 도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엘리트의 지위를 가진 부자를 예수님은 “한 부자”가 있었다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름이 있지만 부자에게는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반전입니다. 여기에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는 부자는 그의 집 앞에 헌 데가 가득한 몸으로 앉아있는 있는 나사로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는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보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시대에서 지역사회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부유한 자들의 역할의 일부였다고 합니다. 대게 부자들의 집 밖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을 바라며 기다릴 수 있는 벤치가 있었고 대문 앞에 있는 이 벤치에 앉아 있는 거지는 특히 잔치를 연 사람들과 손님들의 관심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폼페이의 유적들에서 부자들의 큰 집 앞에 기다리는 벤치가 발굴되어 우리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말 그대로, “문 앞에 던져졌었다.”
이 동사의 수동형은 그가 그 자신의 힘으로 거기에 간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이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 되길 바랍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 의해 그 자리에 앉혀졌고, 그는 헌데를 핥는 개들을 쫓아버릴 힘조차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 중 “던져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의 가난한 상황이, 그의 처참한 상황이 누군가, 또는 우리가 “던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대로 놓여드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가난한 이를 향한 ‘희망’을 전하고 계십니다.
“나사로”... 가난한 사람의 신분에 대해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면에 부자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 말씀에 계속 등장하는 대조의 연장선입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다
나사로는 헌데 투성이이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긴다.
나사로는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 대조는 계속 됩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이끌려 간다.”
부자는 매장된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
부자는 음부(Hades)에 있다.
“∼의 품”에 있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1:18-NRSV에서는 “가슴”을 사용한다)와 예수와 사랑받는 제자 사이(요한복음13:23)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이 단어는 잔치자리에서의 명예의 지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지옥이라고 번역된 음부, “하데스”는 로마의 신화에서 유래한 단어로 처음에 지하세계의 신을 가리키며 후에 이것은 (히브리어의 she'ol[쉐올]처럼) 죽은 자들의 장소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을 때처럼, 죽음이후에도 이들은 대조적입니다. 죽음 이후의 대조적 모습이 24절부터 등장하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로 이어집니다.
---— B.대화(24-26절)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사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을 물에 적셔 내 혀를 시원케 해주십시오”
이 이야기의 역설은 구제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그가 지금 ‘자비’(eleos)를 요청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와 누가복음 곳곳에서는 사람들 사이를 평등하게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 운명을 뒤바꾸십니다.
우리의 운명이 뒤바뀐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이 지금 부유한 나라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부자를 항한 아브라함의 근본 교훈은 “기억하라”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도둑에 의해 사용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23:42). 이 단어는 무덤에서 여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말하는 “남자들”(천사들)에 의해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24:6,8).
부자는 그가 살아있을 동안에 나사로, 가난한 이들을 던져진 이들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지요.
그렇게 부자와 나사로에겐 크게 갈라진 틈이 고정되어 이제는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없습니다. 만약 비유가 이 지점에서 원래 끝났다면, 우리를 위한 메시지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재산을 바르게 사용하는 데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다시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합니다.
--— C.추가 구절들(27-31절)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죽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이 부자의 간청은 이제 진실되어 보입니다. “그를 구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의 형제들을” 위하여 간청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제발 이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또한 그들을 위해 나사로가 그들에게 가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간청하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
그러나 부자는 더욱 건청합니다. “안됩니다. 죽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부자의 간절함은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도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지금 아브라함에게 간청할 뿐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들이 ‘믿지 않을’것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해야 믿게 될까요?
어떻게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운명을 바꾸실 수도 있다는 것을 믿게 될까요?
오늘, 믿음을 위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24장 예수 나를 오라하네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