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72번 이사야 58장
(인도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회중)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인도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회중)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인도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 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회중)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인도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회중)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인도자)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회중)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인도자)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회중)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다같이)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6-11)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10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
말씀 _ 누가복음 16장 1~13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누가복음 16장 1~13절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진술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영리한 청지기(16:1-8a-병행구절이 없음)
∙세상의 지혜(16:8b-9-병행구절이 없음)p
∙지극히 작은 일에서의 충성(16:10-12-병행구절이 없음)
∙두 주인을 섬김(16:13-14//마태복음6:24//도마복음47:1-2)
이 말씀의 대상은 비교적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오늘의 본문을 불의한 재산 관리인의 비유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는데 그 관리인을 제자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그 이야기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인 바리새인들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이야기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 부분이 다음주 말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에겐 재산 관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관리인이 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관리인을 불렀습니다.
“그동안 자네가 했던 일을 정리해 주게”
주인의 말에 관리인은 생각했습니다. ‘일을 뺏기게 되었구나, 어떻게 해야하나?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하구나.’
‘그럼, 내가 쫓겨나가게 된다면 갈때가 필요하겠구나. 사람들이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겠다.’
그리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빚을 줄여주었습니다.
이 결말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 그려집니다.
주인은 그 관리인을 칭찬합니다. 헬라어 직역의 본문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 주인은 불의한 재산 관리인이 약삭빠르게 행동하였기에 그를 칭찬하였다.” “불의한 재물로 너희를 위하여 친구들을 만들라.”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누구든지 매우 작은 일에 신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신실하고 매우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도 신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재물을 맞기겠는가?"
"그 어떤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이 이야기는 분명 다른 두개의 관점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먼저 1~9절까지입니다. 9절까지는 불의한 관리인은 매우 영리한 청지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관점에서는 다른 말로는 세상의 이해관계에서는 불의한 청지기는 매우 영리한 청지기가 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러나 제자들이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관리인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그 선택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노동을 할 처지가 아니고, 자존심이 너무 강해 구걸할 수도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는 신속하게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을 계획을 진행합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한 방법으로 그의 주인의 고객들에게로 그의 관심의 방향을 돌립니다.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부정한 일을 하기로 한 그의 선택은 그의 주인이 아니라 그의 이웃들입니다.
때때로 신앙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벗어난 의로움이나 순결을 유지하라는 권고를 받게됩니다. 하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교회를 벗어나게 되면, 또는 예배 이후에는 정의와 평등과 평화를 위한 중요한 목소리를 종종 듣지 못하게 됩니다. 복잡하고 힘든 체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순응이나 저항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서 살든지, 아니면 21세기의 미국에 살고 있든지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실은 비슷해서, 협상하고, 선택을 저울질하고, 다음번 결정에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이 더 중요한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세대의 지혜를 칭찬하신 것은 이런 종류의 상황들을 염두에 두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마지막 절은 단호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수 없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재물, 섬김에 집중할수도 있지만 “너희는”에 집중한다면 “청지기”의 충성이나 헌신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생의 선택은 복잡해서 명확하지 않을지라도, 마지막 절은 명확하게 하나님의 선물들을 관리할 때의 신실함은 예수님를 따르는 사람들의 최우선순위라는 것입니다.
13절은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한편을 사랑하든지”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두 “주인”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 순 없을까요? 하나님과 세상(돈)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이것이나 저것을 미워해야만 하는가요? 두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 둘 다를 사랑하는 중간지대가 거기에 있을 수 없는가요?
NRSV에서 “serve, 섬기다”로 번역된 단어는 섬기다(diakoneo)를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의 노예가 되다” 또는 “∼의 지배를 당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일한 단어가 맏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를 위해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일했습니다”(한글개역개정에는,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라고 말하는 15:29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John Ronsvalle의 책 <Behind the Stained Glass Window>에서는 (마태복음의) 병행 구절에 관해 중요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6;24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프랑스 철학자 Jacques Ellul은 이 본문에 대해 예수는 맘몬을 “일종의 하나의 신,” 즉 우리의 영혼을 놓고 하나님과 경쟁하는 세력으로 의인화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Ellul은 예수의 단어선택은 “예수께서 통상적으로 신격화와 의인화(deifications and personifications)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돈에 관해 예외적인 어떤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돈은 하나의 힘(power)이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예수는 마태복음 6:21에서 돈의 다른 측면을, 즉 돈은 우리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묘사한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돈은 헌신(devotion)의 척도이다. 예수님에 따르면,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 방법은 일종의 영적 온도계처럼 우리에 관해 어떤 것을 나타낸다. [p. 29]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곰곰 생각해 보면 “재물”을 섬기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깨닫게 됩니다. “재물”은 섬길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재물”은 어느새 우리가 섬기는 주인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0절에서 “신실한 사람”으로 1~9절의 관점과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신실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신실한 사람은 작은 일에도 신실하고 큰 일에도 신실하답니다. 이 말씀의 시작을 마지막 말씀과 연결지어보면 신실한 사람이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는 사람이 신실한 사람입니다.
신실은 헬라어로 “믿음”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신실은 곧 하나님의 특성이시지요.
신명기 7장에서 “신실”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7:9-10)
신명기 7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과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영리한 사람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실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요?
그리고 Craddock (Luke, Interpretation Commentaries)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주석을 마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삶은 매일의 수많은 친숙한 임무들에 성실하게 관심을 갖는 삶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작고 무의미해보일 수가 있다. 이 진술들의 리얼리즘은 단순히 인생은 매우 작아 보이는 기회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 주일에 배의 이름을 짓거나 책을 쓰거나 전쟁을 끝내거나 내각을 임명하거나 여왕과 저녁식사를 하거나 한 민족을 개종시키거나 화형을 당하는 중대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 주일에 우리에게는, 사람들에게 물 한 잔을 주고, 짧은 편지를 쓰거나, 양로원을 방문하고, 지방의회를 위해 투표하고, 주일학교 수업을 가르치고, 식사를 나누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합창단 연습에 가고, 이웃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는 그런 기회들이 주어질 것이다. [pp. 191-192]
아주 작은 일에 신실한 사람이 우리교회, 우리들이길 소망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