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31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115번 구주강림(1)

(인도자)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회중)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인도자)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회중)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인도자)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회중)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시62:10-12)
(인도자)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회중)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인도자)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회중)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다같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눅3:4-6)

송영 _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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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말씀 _ 누가복음 21장 25~36절 무화과나무를 보라!

신약성서 학자인 N. T. Wright의 책인 <Simply Christian: Why Christianity Makes Sense>에서 그는 대림절은 “예수의 다시 나타나심”이 더 적절한 문구이고, 그것이 일부 초대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매 순간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하늘과 땅을 분리하는 보이지 않는 휘장 뒤에 숨어계시고, 우리가 기도하고, 성례전을 행하고, 성서를 읽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런 순간들에 휘장이 뚫어진다. 그러나 어느 날 그 휘장이 걷히고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될 것이고, 그곳에 예수가 인격적으로 함께 계실 것이며,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에 절할 것이며, 피조물들이 새로워지고,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이다. 새로운 전망과 가능성들로 충만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마침내 거기에 있게 될 것이다.”(p.219).

누가복음 21장 5-36절은 종말론적 강론에 대한 누가의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가복음 13:1-337과 마태복음 24:1-25:46).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강론은 감람산 위에 있는 제자들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익명의 “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의 행위들의 보편성(universal-ness)으로 온 세상이 그의 오심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다른 말로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이런 묵상을 하곤합니다. “나는 무관하다고 하여 정말 무관해 질 수 있는가?” 성서는 계속해서 ‘징조’들을 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우리는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를 피해가는 말씀이 있을까요?

누가복음 21장 25절 말씀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징조가 있을 것이다.”

“…에는 징조가 있겠고.”

누가만 이 부분에서 “징조들/표적들”(signs)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단어가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7절 단수-마가복음과 동일)라는 질문과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니”(누가복음에서만 11절에 나옴)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2:12).

다른 편으로 징조들은 수 세기 동안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징조들은 우리 주위에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Luke Timothy Johnson (Luke, Sacra Pagina)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론의 이 세 번째 부분으로의 전환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21장25절에서 7절의 “징조”란 용어를 반복하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하지만 지금 묘사되고 있는 것들은 신자들의 과거의 일이나 도시의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심판 때의 사람들의 보편적인 경험에 관한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누가는  “민족들 사이에서의 불안과  혼란”(25절), 즉 “사람이 거주하는 세상”(oikoumene, 26절)과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35절)에게 임할 일들에 대해 말한다. 만약 이 암시들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면,  “징조들”에 대한 누가의 설명은 전쟁과 혁명(10절), 심지어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하늘의 불길한 현상(11절)이나 도시를 에워싸는 군대들(20절)에 대한 것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일월성신에서 일어나는 우주적인 사건들(25절), 바다의 소동들(25절), 하늘의 권능들의 흔들림(26절)에 대한 것들이다. [p. 330]
“일월성신에서 일어나는” 이 징조들은 다음과 같은 선지자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가 돋아도 어두우며 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이사야 13장9-10절)
“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을 어둡게 하며 를 구름으로 가리며 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스겔 32장 7-8절)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가 어두워지고 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요엘 2장 30-31절).

이 하늘의 징조들은 오심을 기대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꾸로 예언자들의 말의 성취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약속과 성취는 누가복음 전체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지요.

종말의 다른 말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약속을 믿으십니까? 징조와 표적을 보셨습니까? 징조와 표적은 약속의 성취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할 것입니다.

누가는 유대-로마 전쟁 동안에 발생한 재난들 몇 가지를 보도하는 중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징조들, 즉 고대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식, 흔들리는 별들, 엘니뇨, 지진과 같은 현상들은 늘 우리와 함께 있어 왔습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혼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종말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종말 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징조와 표적에 눈을 담고 귀를 닫은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말의 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누가복음에서 놀라운 부분은 “사람들”과 “너희”의 대조되는 모습에 있습니다. 징조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모두에게, 그런데 발생하는 일에 대한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이다.”(26절) 하지만 너희는 “일어나서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구원)이 가까웠느니라.“(28절, 누가복음에만 나옴).

20절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게 될 때에, 그것의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는 말을 듣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로서가 아니라, 종말이 가깝다는 징조로서 이해되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28절에서 우리 속량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속량”(redemption)을 뜻하는 단어 apolytrosis는 몸값을 지불하고 누군가를 석방하거나 자유롭게 한다는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바로 “속량”입니다. 예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가 가장 큰 선물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속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무엇이고, 누구일까요?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지불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속량’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는 ‘속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지금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가 우리를 속박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박해’와 ‘공포’와 ‘두려움’도 우리를 속박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32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잠에 짓눌려 있다가(weighed down with sleep), 온전히 깨어난 후에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9:32). 변화산에서, (잠에) “짓눌린” 것과 예수의 영광을 보게 된 사이의 대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짓누를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걱정과 우리 자신의 쾌락입니다.

우리 모두는 “생활의 염려들”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를 “짓누르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재물과 삶의 향락과 더불어 “걱정들”이나 “염려들”(merimna)이, 말씀이 심은 것을 질식시켜 그 열매가 성장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8:14)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11-12)

그렇다면 염려하지 않는 방법? 짓누르지 않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마지막 그날을 향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묵시문학’의 지혜입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이다.”(26절) 하지만 너희는 “일어나서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구원)이 가까웠느니라.“

그리고 또 하나, 감사하기입니다. 감사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채우는 것은 염려를 내쫓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염려할 것보다는 감사한 것 하나를 더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짓눌리다”의 반대말은 ‘깨어있거나 조심하다’입니다. 거기엔 항상 기도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염려에 짓눌려서 기도하지 못하고 있나요?

33절 말씀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기도하는 사람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게 될 말씀의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싹이 나는 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운 것을 아는 사람들이 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방탕하지 않고, 술 취하지 않으며, 생활의 염려로 마음을 둔하게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러므로 대림절기, 인자 앞에 서도록  기도하며 깨어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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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11장 아 내 맘 속에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