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 교독 _ 교독문 15번 시편 27편
(인도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회중)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인도자)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회중)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인도자)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회중)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인도자)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회중)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인도자)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회중)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인도자)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회중)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1-6)
송영 _ 찬송가 4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50장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말씀 _ 누가복음 23장 33~43절,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참으로 놀랍게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왕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구원”과 “용서”, “낙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는 표현인, 하나님의 나라(hē basileia tou theou)는 생각보다이해하기가 어려운 표현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요?
- 왕국(basileia)은 왕이 통치하는 지역을 가리킬 수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17,24,25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왕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들어가거나, “하나님의 왕국”과 같은 천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 왕국(basileia)은 왕으로서 통치하는 힘이나 권위를 가리킬 수 있다. 이런 이해를 가질 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나/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두 번째 의미를 갖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17:20).
그 나라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이다(17:21).
그 나라는 선포되거나 전파되는 어떤 것이다(4:43;8:1;9:2,60;16:16).
하나님의 나라는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나라는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고(12:31),
선물로 주어질 수 있고(12:32), 받아들일 수가 있다(18:17).
그 나라는 가까이 왔다(10:9,11;21:31).
“하나님이 다스리는 장소”보다는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의한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3장 2절의 예수에 대한 고발에는 예수가 “자칭 왕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을 받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본문입니다. 이어 오늘 본문에서 그 표현은 두 번 더 등장하게 됩니다.(37,38절) 그리고 그들은 모두 “너 자신을 구원하라”는 동일한 말을 하지요. 이것은 본질적으로 누가복음 4장에서의 마귀의 유혹과 동일한 것이며,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다른 한 죄수의 고백 또한 듣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시인합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십자가형은 그의 범죄에 대한 “정당한” 처벌입니다. 그는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며 예수님에 관한 진실을 고백합니다.(41절).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의 “고백”의 헬라어 문법은 “이 사람이 유대인의 왕이다!”는 경멸의 뜻의 담긴 패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마도 성서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의 행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basileia-왕국/통치/권세)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그의 간청일 것입니다.
예수님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중입니다. 명백한 사실은 이 왕과 그의 나라와 그의 권세가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처형의 목적이었습니다.
사실, 이 죄수의 믿음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가 그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믿음”의 행위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고백의 때가 또는 그가 믿는 믿음을 가진 때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수의 간청보다 십자가의 신학을 더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신학에 관한 루터의 가장 짧은 진술은 하이델베르크 논제(Heidelberg Disputation)에서 발견됩니다.
19.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것들(일들)을 실제로 발생한 일들에서만 명확하게 지각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은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없다.(롬 1장 20절)
20. 그러나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 눈에 명백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
21. 영광의 신학은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고 부른다. 십자가의 신학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
다음은 하이델베르크 논제 21을 위한 “명제들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 속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고통보다 행위(works)를, 십자가보다 영광을, 약함보다 힘을, 어리석음보다 지혜를, 일반적으로 악보다 선을 더 좋아한다. 이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빌립보서3:18).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와 고통을 미워하고, 행위와 행위의 영광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의 선을 악이라고 부르고, 행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른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고난과 십자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친구들은 십자가는 선이고 행위는 악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행위는 멸망되고, 특히 행위에 의해 교화되는 옛 아담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때문이다. 그는 무가치하고, 그의 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을 알 때까지 고통과 악에 의해서 먼저 위축되고 파괴되지 않으면 그의 선한 행위를 과시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영광의 신학과 대조적인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신학자 김영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이는 것, 그의 뒷면을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서 보고 지각한다.” 루터는 출애굽기 33장 주석을 통하여 십자가 신학을 전개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간구한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의 얼굴을 보는 자는 살지 못하리라“(출33;20). 하나님은 모세를 바위 틈에 두시고 그의 영광이 지나가기 까지 모세를 그의 손으로 덮으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뒷면만을 보고, 그의 영광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의 뒷면을 보는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신자의 십자가를 하나님 인식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이 숨어계신 처소, 즉 약하심, 미련함 속에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을 고난과 수난으로 부름 받은 자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이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인간을 무능화 한다.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하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인간 속에 행하시도록 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수용하는 자가 된다.
십자가 신학은 영광의 신학의 기준에 따르면 고난, 즉 악함과 미련함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한다. 루터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역들로부터 하나님의 인식을 오용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고난으로부터 인식되기를 원하며, 보이지 않는 본성의 지혜는 보이는 본성의 지혜를 통해서 폐기되기 원하신다.”고 한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됨과 십자가 속에 그의 감추심은 대립된다. 루터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신학과 진정한 신 인식이 있다. 십자가는 자연신학과 자연적인 에토스(ethos)의 자기의식을 깨뜨린다. 십자가는 인간의 성공이나 번영의식을 깨뜨린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경험한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에 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세상의 지혜에는 감추어져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연약하고, 우둔한 것이 나타나 있다.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신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증언한다. 이것은 오로지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을 통하여 가능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폐(die Verhehlung Gottes)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능(die Ohnmacht Gottes)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직접적으로 계시되지 않고 역설적으로 그의 무능과 낮아지심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진노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선물과 복은 십자가 아래, 말하자면 “불행과 재난” 아래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의 눈에는 거짓(Lüge)으로, 세상의 거짓은 진리로서 나타난다. 루터는 하나님은 세상에 대하여 악마처럼 다가온다. 십자가 신학의 사고에 의하면 하나님은 수천 명, 수 만명이 모여서 열광하고 설교자가 스타처럼 청중의 환호성을 자아내게 하는 설교단에 계시기보다는 인간적으로는 너무나도 초라한 소수의 무리들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말씀을 듣는 세상적으로 너무나도 초라한 설교단에 임재해 계신다.
설교자가 마치 황제처럼 청중들을 종교적 열광으로 몰아가고 번영과 성공을 나누어주는 설교단이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지닌 소수의 청중에게 재난과 어려움과 질병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진실한 설교단에 하나님은 임재해 계신다.
영광의 신학은 통찰력을 갖고 있지도 합당한 신학도 아니다. 실제로 자연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모르므로 고통보다 행적을, 어리석음 대신 지혜를 선호하기 때문에 십자가 고통에 감추어진 하느님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한 자들은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빌립보서 3:18)이다. 실제로 그들은 십자가의 고통을 혐오하고, 업적들과 그 영광을 좋아하며, 그리하여 십자가의 선을 악이라, 악의 행업을 선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자기 행업들에서 추론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남용했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와 반대로, 즉 당신의 고통을 통해 인식되기를 원하셨고, 또 그리하여 가시적인 것에서부터의 인식을 새로이 입증하셨다.
예수님과 이 죄수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이 죄수는 그들의 고통과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은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조차도 믿음을 가지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계실 때, 그리고 죽어가고 계실 때나 “고통과 악에 의해서 위축되거나 멸망당할 그 때”에 예수께서 강력한 왕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믿음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 위에서 믿음을 고백함으로 주와 함께 낙원에 있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