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1장 다 찬양하여라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72번 이사야 58장
(인도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회중)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인도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회중)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인도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 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회중)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인도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회중)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인도자)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회중)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인도자)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회중)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다같이)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6-11)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50장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말씀 _ 누가복음 17장 11~19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고 있다는 것을 다시 우리에게 상기시켜줌으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시작된 여행은 (13:31-35과 14:25에서 다시 언급된) 19장 28절, 예루살렘입성으로 끝이 납니다.
누가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는 예수님과 그 일행의 이야기로 제자들을 향한 시선에서 10명의 새로운 인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열명 중 또다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우리에게 다시 한번 유대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 자신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방인”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믿음은 언제나 “겸손”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주께 믿음을 간구하게 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더욱이 오늘 말씀은 이방인(사마리아인) 한 사람과 아홉 사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어 그 아홉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믿음”, “주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방인의 믿음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10명의 사람들과 만나셨습니다. 우연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소문이 그 마을까지 퍼졌을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이 10명의 사람들은 그 마을 입구에서 예수님과 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기엔 이들의 행동이 다릅니다. 예수님을 보았으면 당연히 달려와야할 텐데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들이 예수님께 달려올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병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설명하는 나병은 의복과 집까지도 오염될 수 있었습니다(레위기 14:55). 레위기 13-14장은 “나병”에 관한 율법을 제공하고 있는데 육체적인 치유를 확인하고, 그 사람으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지위를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제사장의 검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레위기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여기서 10명의 사람들을 다시 보게됩니다. 그들의 절박함과 간절함은 예수님과 일행들에게 자신들의 병이 옮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멀찍이 서서 소리를 지를 뿐입니다.
사실, 레위기에서는 나병환자들에게 “멀리 서서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사람들”이 그에게 너무 가까이 가서 감염되지 않도록 그들은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치며 살아야만 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습관대로 멀찍이 서서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10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 채 그들을 위해 회복을 명령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그런데 너무도 간절하고 절박하지만 그 절박함 때문에 타인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 않을 만큼의 멀찍이 서 있을 수 있는 그들의 마음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만 살면 돼”라는 마음이 아니라 혹시 나 때문에 아플 수도 있다면 멀찍이 서 있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예수님께선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자 그 즉시 말씀하신 건 아닐까요?
그들은 모두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깨끗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집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로,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그의 얼굴을 대었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멀찍이 서 있을 수 밖에 없던 그는 이제, 예수님의 발 앞에 그의 얼굴을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의 마음이 보이시나요? 너무도 아름다운 장면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예수님의 발에 저의 얼굴을 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이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다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되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
다시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네 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치유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1. 7장 50절 죄가 용서받았다. (갈릴리 가버나움, 죄 많은 여인이 향유를 붓다.)
2. 8장 48절 혈루병이 치유되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대다.)
3. 17장 19절 나병이 깨끗해졌다. (오늘 본문말씀)
4. 18장 42절 보지 못함이 치유되었다. (여리고에서 예수님을 소리쳐 부르다.)
오늘 본문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치료하였다”는 말은 치유 받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게만 선언됩니다. 분명, 깨끗함을 받은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 구원(sozo)은 “위험에서 구출하다, 이전의 안정과 복지의 상태로 회복하다”는 기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위험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라서 “구원하다,” “치유하다,” “온전하게 하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Craddock (Luke, Interpretation Commentaries)은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야기는 열 사람이 고침을 받지만, 한 사람이 구원받는 이야기이다.”[p. 203].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참으로 익숙한 질문입니다. 많은 이단들도 같은 질문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도 합니다.
10명의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몸이 모두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사람, 이방인이요. 사마리아 사람은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그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사람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믿음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그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15절) 그는 돌아오며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에 그의 얼굴을 대고 엎드렸습니다. (16절) 그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Culpepper (Luke, New Interpreter's Bible)는 14절과 15절에서 “보다”는 단어의 사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보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보는 것 이상을 뜻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 기회를 깨닫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편으로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p. 326]
“여러분이 볼 때 무엇을 하는가? 예수는 필요를 보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행동하셨다. 나병환자가 치유를 보았을 때 그는 단지 자신의 행운을 기뻐하지만은 않는다. 그는 되돌아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 앞에 엎드린다. 감사는 사람의 성품과 영적인 상태를 판단하는 가장 순순한 척도이다.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는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받을 가치가 있으므로 나는 감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자기중심성이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p. 327]
사마리아 사람이 깨끗함을 받고 가장 먼저 한 행동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그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는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 심지어 그의 신분이 회복되기 위하여 제사장에게 가는 것이 먼저였지만 그는 가는 동안에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찬양을 부르며 예수님께로 달려왔고 그는 예수님의 발에 그의 얼굴을 대고 감사하였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방인의 믿음을 보았고 구원받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지금도 치유함을 받습니다. 고침을 받습니다. 깨끗해지기도 합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돈과,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어 우리의 삶이 나아집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삶은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을 필요가 있는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믿는 것이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 어떤 차이를 만들고 있을까요?
우리의 삶은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찬양 _ 찬송가 539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주기도문 (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