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1장 다 찬양하여라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104번 종교개혁주일
(인도자)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회중)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인도자)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회중)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인도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회중)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오니
(인도자)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회중)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인도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회중)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인도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회중)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하-32)
(인도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회중)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다같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15:57-58상)
송영 _ 찬송가 5장 이 천지 간 만물들아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말씀 _ 누가복음 19장 1~10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어릴적부터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의 이야기는 자주 주일학교의 말씀에 등장했기 때문이지요. 작고, 조금은 과장되게 귀엽게 그려진 삭개오의 삽화는 아주 친숙 레퍼토리(repertory)가 되었지요.
“삭개오”는 “의로운 사람 또는 순결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사실, 뽕나무로 알려진 그 나무는 헬라어로 ‘시코모레’라고 불리는 나무로 우리나라에 자라지 않기 때문에 우리말 이름도 없지요. 하지만 시코모레 나무 열매의 모양이 무화과와 유사하게 생겼고 무화과보다는 크기가 작고, 단맛이 덜해서 우리말로 ‘돌무화과나무’로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한 이야기가 사실과는 다를 수 있다는 의미를 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은 사실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는 “메세지”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흔히 우리가 고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 부분이 “메세지”를 다르게 해석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은 것(being little)
삭개오의 “작은 키”((helikia mikros)와 누가복음의 다른 몇몇 진술들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작은”이라는 표현입니다.
∙ 12: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9:48 "누구든지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니라."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17: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독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작은 것”이 예수님의 나라에서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닐 수 있도 있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누가는 분명하게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는 부정적 의미지를 그리게 되지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에 대한 정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일어났다, 왜냐하면 이 사람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9절 말씀이 오늘의 주제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구약 시대의 구원은 주로 어떠한 위험이나 악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패전(출 15:2), 고통(시 34:6), 폭행(삼하 22:3), 조롱(시 57:3), 포로(시 106:47), 사망(시 6:4), 죄(겔 36:29)로부터의 구출입니다. 이 구원의 행위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출애굽입니다.
이후 왕국 시대로 오면서 점차 선지자들에 의하여 구원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에 포함되었고(왕상 8:41-43; 사 52:10), 개인 차원에서의 구원도 점점 증가되었습니다. 곧, 구원은 출애굽처럼 집단적으로 민족 전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남은 자, 곧 의인들에게만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되었지요.
더욱이 구약 시대 후반부로 오면서 메시야 사상이 발전하여 구원 개념은 점점 ‘죄로부터의 구원’과 ‘메시야 왕국의 도래’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사 52:13-53:12).
신약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엡 2:13-18). 물론 질병이나 가난, 고통, 위험으로부터의 구원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마 9:21-22; 24:22; 막 5:23; 요 11:12; 행 4:9; 27:20) 이런 고통 역시 죄사함과 더불어 해결되는 것을 볼 때 결국 신약에서의 구원은 죄를 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을 쏟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온전한 화목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롬 5:9). 삭개오에게 일어난 오늘의 구원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8장에서 부자가 등장하지요. 그리고 그는 구원 받을 수 없어 보입니다.
“너에게 아직 부족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뭉릉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눅18:22) 그러자 그는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무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아마 부자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의 한 예시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4).
누가복음에서만 제기된 또 하나의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예수님은 직접 대답하지 않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고 말하셨습니다.(13:23-24).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찾는 자가 찾아진 자가 된다.
세리장이요. 부자인 그,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라고 시작되지만 이미 3절에서 삭개오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지만 사람들이 많고 그의 키가 작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 나가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다고 장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무지 애를 썼다는 것이지요. 그는 오늘,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동일한 단어(zeteo)가 두 번 등장합니다. 예수님를 보기 위해 “찾거나” “시도하는” 삭개오(3절)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예수님(10절)입니다.
삭개오가 찾았습니다.
그가 먼저 찾았고, 예수님을 찾고 있는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보셨고,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 오늘의 메시지의 전부일 수 있습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는 그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찾았다는 것은 그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가 그의 소유를 버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의 입장에선 잃어버린 것을 찾았으니 그의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찾고 계신지요?
구원을 뜻하는 단어 sozo는 “온전하게 만들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몇몇 번역자들은 이것을 “∼에게 새 생명을 주다” 또는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하다”와 같은 표현으로 번역함으로써 신체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를 모두 결합하여 설명을 하기도합니다.
삭개오의 구원은 그가 줌으로써 그의 삶을 온전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원은 우리들을 온전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흠이 없으며 완벽하고 완성된 상태. 마음의 자세와 동기가 순수하고 그 행위가 진실하고 깨끗하고 강직하며, 그 목표하는 바가 흔들림 없는 상태. 성경에서는 이 ‘온전’함이 철저히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살전 5:23), 하나님이 그 원형이시며(마 5:48), 또 하나님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겔 27:4; 히 7:25; 벧전 5:10).
그리고 희생제물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서(출 12:5; 민 19:2),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설명할 때(신 32:4) 성도가 갖춰야 할 거룩한 품성이나 행실(잠 2:7; 계 3:2)을 말할 때에도 언급되지요. 노아(창 6:9), 아브라함(창 17:1), 야곱(창 25:27), 다윗(왕상 9:4), 욥(욥 1:1, 8), 사가랴와 엘리사벳(눅 1:6), 나다나엘(요 1:47) 등이 온전한 이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공허함, 박탈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삭개오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다 가졌어도 다 갖지 못한 현대인의 모습과 더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그가 잃어버린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눅11:9~10)
오늘, 우리가 찾는 것이 “구원”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