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8장 거룩거룩거룩 전능하신 주여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94번 새해(2)

(인도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회중)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인도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회중)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인도자)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회중)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인도자)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엡1:3-9상)
(회중)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인도자)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회중)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12)

송영 _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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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552장 아침해가 밝을 때

말씀 _ 누가복음 4장 21~30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이번 주일, 본문 말씀은 지난 주일의 본문 말씀 후에 일어난 사람들의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혹은 예수님의 설교가 끝나자 즉각적인 반응이 22절에 등장합니다.

요셉의 아들-고향 소년

사람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22절). 그리고 이 물음은 23절과 연관 지어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3절 고향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십시오.

23절 말씀의 ‘고향’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보면 22절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물음은 “우리 고향 사람이 아니냐?”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이 말의 의도를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의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22절에서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그러니까 놀라 묻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장면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말의 의도는 23절과 함께 해석해야 하고 그 중심에 “고향”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의 고향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3절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하고 말하려고 한다.”

즉, 무리들이 하는 말은 “예수님, 이제 당신의 능력을 알았으니 그 능력을 가버나움이나 다른 동네에서 사용하지 마시고 우리 고향에서 그 능력을 행해주십시오.”라는 의미가 됩니다.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기보다는, 예수님이 고향 소년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고향’을 위하여 일할 의무가 있음을 예수님께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무리들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다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우리가 그저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단절을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24절)

선지자는 그의 고향(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 그래서 사람들의 충성심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이들이 선지자입니다. 사람들의 기대로는 선지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선지자들은 ‘우리들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집단 내 사람들이 아니라, 배제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선순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선지자를 환영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지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교회는 어떠해야 할까요?

교회가 구성원들(교인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사회, 무리들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교회가 집단 내 충성심의 지배를 받아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목적”의 지배를 받아야 할까요?

우리는 과연 어떤 교회를 원하고 있는지요?

물론,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통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회 내 “우리”들을 위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관심이 세상을 향하여, 수없이 많은 배제된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아마도 이방인이었던 누가는 “우리, 유대인”들을 위한 예수님을 넘어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족, 우리집, 우리...를 넘어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왜?

21절부터 시작된 오늘의 사건 30절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시는 장면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떠나시게 된 이유가 무리들의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15절에 ‘칭송을 받으시더니’와 22절에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와 전혀 다른 결론입니다.

도대체 왜? 무리들은 분노하였을까요?

무리들의 분노는 이렇게 뿜어져 나옵니다.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자”

예수님은 분노한 무리들, 그들 가운데를 지나서 가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무리들은 분노하였을까요? 이 질문은 이렇게 바꾸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리들은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요?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모든 큰 일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무리들의 기준으론 예수님은 성공한 고향 청년이었으며, 그 영웅이 다시 고향에 돌아와 있는 중이었지요.

“지금 예수가 다시 돌아왔다. 이제, 예수는 히브리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를 것이다. 예수는 우리 마을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상들을 쫓아내도록 도우실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나사렛을 바꾸실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나사렛을 살기에 더 좋은 장소로 만드실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나사렛을 다시 경건한 마을로 바꾸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기대는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렸습니다.

25~27절에서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가난한 이방의 과부에게 음식을 공급하셨다. 그 기근 동안에 이스라엘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음식을 제공받지 못한 가난하고 굶주리는 많은 과부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방인 나병환자인 나아만을 고치셨다. 그 시기 동안에 이스라엘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치유를 받지 못한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다.”

누가는 세례 요한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8).

유대인들은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오로지 그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했음을 진실된 눈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대에 맞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왜 기뻐하지 않는가?

지난 주 말씀을 다시 기억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는 부르심과 능력을 받았습니다.

• 오늘 주의 성령이 내게 임했다.

• 오늘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

• 오늘 나는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준다.

• 오늘 내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

오늘, 예수님은 지금 때가 왔다고,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고, 구원이 가까웠다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기쁜 소식입니다.(43절).

이 기쁜 소식은 우리들만의 복음이 아닐 것입니다. 이 복된 소식이 우리를 넘어 이 땅의 모든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 이주민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 때에 참으로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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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