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2장 만유의 주 앞에
신앙고백 _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82번 빌립보서 2장
(인도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회중)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인도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회중)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인도자)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회중)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인도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회중)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인도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회중)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다같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5-11)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170장 내 주님은 살아계셔
말씀 _ 누가복음 24장 13~35절
4월에 셋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누가복음에 있는 말씀을 나누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관점이 좀 다른 거죠. 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이야기들이 조금 더 다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렇게 저렇게 논쟁을 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느냐, 똑같아야 되는 거 아니냐, 그래야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살아나심에 대한 그것이 역사적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승연이가 이야기하는 거랑 현준이가 이야기하는 거랑 온유랑 이야기하는 거랑 그다음에 시은이가 이야기하는 게 다 똑같아야 맞는 말일까요? 역설적으로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사실일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똑같다면 그것은 조작될 확률이 참 높지요. 그래서 우리가 기사를 쓸 때마다 복사해서 붙여넣기 하는 것에 막 열받아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똑같은 기사를 쓸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우리가 막 열불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각각의 관점이 다릅니다. 그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경험한 것이 다르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신 언어가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자신만의 언어를 가져가십시오. 그것이 몽골어든 그것이 한국어든 자신의 언어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반드시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자신의 언어로 우리가 경험한 것을 증언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으십니까? 이러한 자기의 언어를 가지시기를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죽을 때까지 내가 이렇게 말을 못 하는 줄 모르겠어라고 하지 마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유창한 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고백이 가능할 수 있도록 자신의 언어를 가질 수 있도록 성령이 우리에게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칼 바르트의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기록에는 제가 지난주에는 다섯 번이라고 이야기를 드렸고요, 오늘의 이야기를 압축해 보면 네 번이기도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식사하시는 자리에 제자들과 만나는 이 광경을 합치면 그렇게 되거든요. 첫 번째의 장면을 생각해 보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열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엠마오로 간 다음에 갈릴리라고 해서 그곳에서 다시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모두 다 부활의 이야기, 부활 증언의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 여러분은 함께하셨습니까? 우리가 믿는 신앙의 고백은 그 장면 장면 하나하나에 저와 여러분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신학입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활에 대한 사건, 이 장면이 조금 독특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지금까지는 우리가 듣지 못했던 사람들 두 명이 등장하는 거죠.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먼발치에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예수를 추종하기도 하고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의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되나요? 누가복음 24장 1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글로바라 하는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서만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며 흥분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사실 십자가의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게 누가복음 24장 1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거 독도와 같지 않을까요? 또 위안부 사태와 같지 않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아니라는 거예요. 이쪽은 다 알고 있는데 너만 모르고 있어라고 화가 난 거죠. 지금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가 있니?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사자가 예수님인데 함께 가는 사람이 예수님인지 모르고 지금 흥분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라고 했더니 답을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데도 명쾌한 대답을 해요. 19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너무 명확하게 알고 있죠. 일단은 19절에서 누구다? 나사렛에 있었던 예수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건 모르겠고 나사렛에서 성장한 예수의 이야기라는 역사적 실존이죠. 실제 있는 나사렛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예수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능하셔서 선지자임을 나타냈다라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일어났느냐? 그런 사람인데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어떻게 했대요? 사형 판결에 넘겨주었죠.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이 한 게 아니라고 지금 이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유대인들의 변명이 뭡니까? 우리가 죽인 것이 아니다, 로마가 죽였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사람이 명확하게 정리를 해줘요. "아니야,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을 내렸어",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사렛 예수에 대한 그들의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21절이죠.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너무 바란 거죠. 이스라엘을 속량하기를, 다른 말로 하면 구원하기를 바랐노라. 그의 이슈는 내가 구원받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십자가의 사형 판결을 통해서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근데 그 일이 며칠이나 지났다? 3일이나 지났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일어날 줄, 혹은 그 일이 어떻게든 지금 뭔가 다른 결말로, 우리가 지난주에 이야기했던 부활의 반전처럼 다른 결말이 날 줄 알았는데 결말이 바뀌지 않는 거죠. 여러분 드라마의 결말을 미리 보고 보시지 않습니까? 사실 제가 그렇습니다. 전 결말이 나오지 않는 걸 보지 않아요. 그래서 이 결말이 바뀔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바뀌지 않은 것이 3일이나 지났다라고 하는 그의 이야기에서 간절히 기대했지만 무산된, 그렇지만 무엇인가 여전히 남아있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이 장면으로 등장하게 되는데요, 너무 신기한 게 예수님이잖아요. 글을 읽는 우리는, 말씀을 듣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들 두 명과 함께 걷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 장면에서는 그 두 사람이 옆에 걷고 있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너무 신기하죠. 누가복음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뭘까요? 예수님이 명확하게 걷고 있고 내 옆에 있는데, 나와 함께하고 있는데 그들이 알지 못한다. 이것을 누가가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데 알지 못하는 거죠.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의 개요를 보면 13, 14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셨고 15절에 다시 오셨는데, 16절부터 35절까지 알아보지 못하다가 31절에 알아보고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처럼 사라지시고 두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고, 예수님께서 오셨다가 다시 가시고, 알아보지 못했다가 알아보게 되는 교차대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 있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그들의 표정에 주목해 봅니다. 어떤 표정으로? 17절에 있는 표현입니다. 슬픈 표정으로 길을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슬픈 표정일 때에 예수님이 등장하시게 됩니다.
여러분 부활은 어둠에서, 죽음에서 이기셨다는 이야기를 지난주에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기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다시 이들의 표정에 주목해 보면 슬픈 표정인 것 같습니다. 그 슬픈 표정으로 걷고 있을 때 누가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오셨죠. 그럼 이제 예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들의 슬픈 표정이 기쁜 표정으로 바뀔 것이다. 여러분 기쁜 표정으로 바뀌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걸으시면서 그 슬픈 표정에 대해 "무슨 일이야?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거니?"라고 예수님께서 물어보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 진지해요. 3일 동안에 있었던 일과 예루살렘의 이야기를 막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를, 그 옆에 있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신학자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들은 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 원인은 사람의 일들이 그들 자신의 목적과 성취 방법에 의해서 해석될 때입니다. 자기의 목적과 성취의 방법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는 메시아가 제자들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지를 보려는 새로운 시각이 주어져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자기 목적과 자기 성취에 갇혀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알아볼 수 없다는 설명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러고 계십니까? 그렇게 기독교가 왜곡되고, 하나님께서 평화를 주셨는데 평화가 아닌 칼로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의 목적과 성취 방법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우리가 분별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뜨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빛에 의해서 눈이 멀기 전에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매우 경건하고 헌신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의 눈을 가리시고 다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이 죽음과 부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슬픈 표정에 다시 주목해 보면, 그들의 슬픈 표정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좌절됨으로 인해서 슬플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희망을 상실하고 기대가 무너져 있는 사람은 명확한 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듣지 않고 보지 않는 거죠. 상담을 아무리 해도 힘든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희망을 상실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희망이 없으면 아름다운 꽃도 예쁘지 않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꽃을 보면 귀하다고 반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들이 희망과 기대를 상실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묵상해 보면 그들에게 무엇이 없었을까요? 시간순으로 보면 부활의 은총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글로바와 또 다른 한 명은 부활을 모릅니다. 베드로조차도 나사로를 통해 이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은총이 없었습니다. 죽음을 이겨내는 부활의 소망이 없는 거예요. 단지 기대를 저버려서 슬픈 것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본질은 부활의 은총이 없는 사람은 슬플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기대에 못 미치면 안 슬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은총이 있어야 슬픈 표정이 기쁜 표정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소확행을 말하고 행복을 이야기하더라도, 부활의 은총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어둠을 이기시고 부활의 은총을 허락하신 주님을 믿기에 진정한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조이풀'을 노래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이제 슬픔과는 좋은 이별을 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입니다. 이미 성찬의 예식을 통해서 여러분이 그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셨으리라 믿습니다. 엠마오에 도착하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 위에서 알아보지 못했더라도,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저도 거기서 위로를 많이 받습니다. 알아보지 못해도 주님은 함께 계시고 길 위에 계십니다. 제가 나중에 더 숙성된 설교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가 나누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떼는 것은 우리 공동체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십니다. 그 부재를 느끼며 소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길 위에서 몰랐는데도 도착하니까 희한하게 예수님을 떠나게 하지 않고 붙잡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붙잡아서 엠마오의 집에 셋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쪼개어 축사하실 때 그들이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 둘은 목요일 밤 성만찬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 없었어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이 두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기도하실 때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알아봤죠. "예수님이시구나!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들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다시 살아나셨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장면입니다.
떡은 히브리어로 '레헴'입니다. 기본 의미는 빵이지만 생존을 위한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유대인에게 떡은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 만나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 떡은 '아르토스'입니다. 신약에서 떡은 나눔의 의미를 가집니다. 누가복음 9장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떡을 떼어 나누셨습니다. 만나의 새로운 형태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마지막 만찬에서 "이 떡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도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셨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합니다. 결국 떡을 먹는 것은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숨을 들이마셨다면, 이제 말씀을 먹으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단순히 존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먹는 사람입니다. 내 몸 안에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먹으면 자신만의 언어로 증언하게 됩니다. 성찬에 참여하며 우리는 말씀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창조 세계도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께서 나눠주신 생명을 통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먹을 때 엠마오의 두 사람처럼 "우리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아니하더냐"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실제여야 합니다. 살아계신 분과 지속적인 관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이 사건이 여러분의 매일의 삶에서 실제하는 경험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찬양 _ 찬송가 167장 즐겁도다 이 날
주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