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129번 종려주일
(인도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회중)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인도자)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회중)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인도자)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회중)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인도자)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회중)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9-10)
(인도자)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회중)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다같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148장 영화로운 주 예수의
말씀 _ 누가복음 19:28-40,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일주일이 남은 시점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자 길가에 서있던 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외치 예수님을 맞이하였다는 복음서의 기록,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시작된 기독교의 절기입니다. 교회에서 이 절기를 기념하기 시작된 것은 아마도 4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 21:9-15; 막 11:8, 10;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한복음 12:13)
호산나 [Hosanna]는 ‘오, 구원해 주시옵소서’란 뜻으로 본래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시 118:25)라는 짧은 기도인데, 찬양의 외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초막절 때 제단 주위를 돌면서 환호성을 지르며 이 소리를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짓고 곡식을 저장하면서 지키던 절기(출 23:16; 34:22)인 초막절은 장막을 짓는 절기라 하여 ‘장막절’, 풀로 장막을 만든다 하여 ‘초막절’, 또 추수가 끝난 뒤 갖는 감사절의 성격이 강하다 하여 ‘수장절’로 불린다. )
또한 그 순간 예수님과 함께하였던 제자들은 스가랴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생각하였지요.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한복음 12:15)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스가랴 9:9)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 누가복음에서 “종려나무 가지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종려주일에, 종려나무가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주일아침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누가의 독특한 특징 몇 가지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누가는 이 사건 앞에 두 개의 이야기를 삽입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19:1-10)와 열 므나의 비유(19:11-27, 마태복음 25:14-30는 이 비유를 약간 다른 버전)입니다.
이 두 이야기들에서 제공되는 대조적인 장면들이 있습니다.
- 예수님은 삭개오와 함께 삭개오의 집에 가서 유하신다(19:1-10).
- 열 므나의 비유(19:11-27)에서 “귀인”은 먼 나라로 떠난다.
삭개오의 기사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9:9-10).
열 므나의 비유에서는 멸망을 강조하지요.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19:27).
그렇다면 두 이야기에서 몇 가지 비슷한 점은 무엇일까요?
- 삭개오는 그의 소유의 절반을 내놓습니다. 착한 종들은 그들의 주인을 위해 장사를 하고요.
- 두 이야기 모두 원수들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가신 것을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다(19:7).
왕을 미워하고 왕이 다시 돌아와 자신들을 통치하길 원하지 않는 시민들이 있다(19:14).
예수님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 멀리 떠난 토지주인(귀인)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동안에 은혜로 선물들(달란트들)을 받았고, 돌아올 왕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 되겠지요.
그가 돌아올 때에 심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충성스런 사람들에는 보상이, 원수들에게는 형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처음 장들은 왕이 떠나 있는 동안의 이 책임을 어떻게 수행하며 사는가?의 실제적인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사도행전 1:24~26)
둘째, 오늘의 본문은 삭개오의 이야기와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가 환영을 받을 것인가?, 사람들이 수군댈 것인가? 그의 존재(presence)가 잃어버린 자들에게 구원의 순간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들어가실 때, 누가복음에서만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37절)
2.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39-40절)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입성은 무리들 사이의 분열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다른 복음서들에 나나타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은 “호산나”라고 소리치지 않습니다.(“호산나”는 아람어로 “우리가 당신께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 대신에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을 찬송합니다.(19:38)
누가는 계속해서 “평화”(eirene)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14회, 요한복음에서 6회, 마태복음에서 4회, 마가복음에서 1회, 사도행전에서 7회).
이 평화의 주제는 사가랴의 노래의 끝부분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1:79).
그리고 이 주제는 천사들의 노래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또 시므온의 노래에서도 등장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2:29).
누가복음에서의 평화는 곧 구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평화가 함께하는 곳에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
동시에 누가는 예수의 평화가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다”(12:51).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승리의 입성 앞에 특별한 기사들을 앞에 배치한 것처럼, 그는 특별한 기사(19:41-44)로 승리의 입성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은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19:42,44b).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그의 제자들은 하늘에서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종려주일의 기도가 더욱 간절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가, 세계 곳곳에 종려주일의 평화가 함께 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크라이나, 미얀마,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에도...... 그리고 진정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임하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평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오심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그의 마지막 생애도 “평화”를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십니다.
셋째, 누가만이 예수님의 간청에 대한 (나귀의) “임자들”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19:35~36)
이 매여 있는 나귀새끼의 “임자들”은 그 주님이 누구인지, 그런 부탁을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어떤 자각 없이 그들의 재산을 놓아주었을까요?
누가복음에서는 그 “임자들”이 주님의 더 광범위한 네트워크에 속해있는 잠재적인 일원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내내 “임자들”과 비슷한 다른 사람들의 활동을 입증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8:1-3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과연? 예수사람들이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드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 자신의 것으로 기꺼이 섬기는 사람?
우리들의 이런 생각에 누가는 희망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예수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꺼이, 아낌없이, 즐거이 예수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나귀의 주인”에서 “나귀를 내어 드리고, 예수님을 위해 겉옷을 벗어 그 길 위에 펴는, 그분의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