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99번 나라사랑(1)
(인도자)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시33:8)
(회중)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인도자)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회중)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인도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회중)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시33:10-14)
(인도자)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회중)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시33:16)
(인도자)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회중)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인도자)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시33:18-20)
(회중)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시33:22)
송영 _ 찬송가 5장 이 천지간 만물들아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말씀 _ 누가복음 9장 51~62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오늘 말씀 누가복음 9장:51절에서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누가는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전하고 있는데 갈릴리에서의 사역(4:14-9:50)과 예루살렘 사역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이 단락은 9장51절에서 19장27절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이 여행에서 두 가지 다른 장면이 등장하지요. 하나는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서의 장면(9:51-56)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들 사이의 길을 갈 때의 장면(9:57-62)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태복음(8:18-22)에는 두 번째 사건만 나오지만, 세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만이 등장하고 세 번째 사람은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1.사마리아에서 거절당하심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여행 중 첫 번째 방문지가 사마리아였습니다.
53절에 기록된 “그러나”라는 단어를 보아 아마도 예상하지 못한 사마리아의 거절인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고 제자들은 당황하여 저주를 퍼붓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 꾸짖으시고 곧 다른 마을로 떠나십니다.
신학자 피츠마이어(Fitzmyer)는 예수님을 거절한 이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의 나사렛에서의 거절에 해당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4:16-30). 이 거절은 예수님의 세례(3:21-22)와 예변모하심(9:28-36)이란 비슷한 사건들 직후에 발생하고, 이는 그들이(두 마을사람들)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예수님이 그 목적을 구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모든 부정의 시작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52절에서 “사자”로 번역된 단어는 항상 “천사”로 번역된 단어인 엥글로스(aggelos)입니다. “천사”의 또다른 이름이 메신저(messenger)입니다.
이 사자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위해 준비하는 데 있다”(52절).
그런데 그들은 53절은 “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또는 영접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그들의 반응이 “사자들”을 향한 것임을 암시하지 않지만 사자를 영접하지 않은 것은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이다/영접하다”는 뜻의 이 단어(dechomai)는 9장 5절과 10장 8, 10절에서 예수께서 파송한 열 두 제자들과 70명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또는 어디에선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고 떠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거절당하셨을 때, 다른 마을로 떠나셨습니다. (56절).
때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천사들”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동시에 우리는 ‘영접, 받아들여짐’과 ‘거절’ 사이에 놓이게 됩니다. 여기서 메신저의 역할이 분명해 집니다.
전하는 사람들은 ‘영접’에 목적이 있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메신저는 ‘전하는 사람’ ‘사자’입니다.
‘전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거절’ 당하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떠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길’ 위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 예루살렘이요. 우리가 가는 곳, 최종 목적지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2.실현되지 못한, 길에서의 간청들
첫 번째 사람은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의 목적지를 알았더라면 기꺼이 따르겠다고 했을까요?
58절에서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머리둘 곳조차 없다.”
만약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이 없게 된다면, 그를 따르는 자들은 더 좋은 어떤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될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미리 말씀을 드리자면 세 사람의 선택이 누가복음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누가는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안락에 너무 익숙해져서가 아닐까요?
미국루터교연합회 “신앙의 실천들”은 일곱가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1)자주 기도하고, (2)성서를 부지런하게 연구하고, (3)(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회중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드리고, (4) 다른 사람들을 종종 초대하고, (5)신앙을 전하고 (6)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7) 시간과 재능과 자원을 거저 주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늘 이기적인) 길을 가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두 번째 사람의 경우에, 그에게 따르라(akoloutheo)고 요구한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고, 그가 이 의무를 다할 수 있을 때까지 집에 머무르기를 원했다는 일부 주장들이 있지만, 이에 대한 암시는 본문에 없습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그들 자신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대답은 이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스라엘은 (시신을 무덤에 넣고 봉인하는) 1차 매장 다음에 (뼈가 분해되는 12개월의 시기가 지난 후에 뼈들을 모아서 납골당이나 “유골함”에 다시 매장하는) 2차 매장을 하는 관습이 있었고 1차 매장과 2차 매장사이의 12개월은 애도하는 일의 완성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찰에 따르면, 예수께서 구약성서의 율법에 뿌리를 둔 이런 소중한 관습을 무시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제자도의 중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사람처럼, 어떤 일을 먼저 하게 해달라고 허락을 청하고 있지요.
이 세 번째 사람은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요구했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열왕기상19:20).
엘리야는 엘리사의 요구를 들어주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다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쟁기를 손에 얹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의 가혹하기까지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 삶에서 어떤 악들을 기꺼이 포기할 마음을 가질 수도 있지만, 모든 좋은 일들을 포기하고, 그 좋은 일들을 예수님보다 더 낮은 우선순위에 둘 수 있을까요?
아마 손으로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않는 이미지는 우리의 삶에서 가족과 친구와 안락과 만족들, “성공적인 프로그램들”과 같은 매우 좋은 것들과 그리스도에 의해서 용서받은 우리 삶의 모든 죄들을 모두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여기에 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우리의 선택이 기도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찬양 _ 찬송가 42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