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1일 성령강림 후 제3주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 로마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기독교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신약성서 27권의 책 중 바울서신이 모두 13편입니다. 신약성서 절반이 바울 서신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지금의 기독교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울이라는데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이지만 4복음서에서 바울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한 12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다른 배경,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베들레헴 작은 마을, 어린시절은 나사렛에서, 이후 예수님 12제자와 함께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길리기아의 다소(‘기쁨’이란 뜻의 길리기아의 수도)에서 태어났고(행 21:39; 22:3), 출생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남동쪽 해안 지역에 위치한 로마에 속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자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서쪽은 산세가 험한 데 반해 동쪽은 비옥한 고원 지대로 목축이 잘 발달하여 산양 털로 만든 모직물은 지명을 따서 ‘킬리키움’(Cilicium)으로 불렸는데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였고 일찍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행 6:9)
또 다소는 동서양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일찍부터 철학과 학문이 발달하였고 많은 철학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곳 다소에서 유대인이지만 신분상으로는 로마 시민권자였으므로, 좋은 문화와 교육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또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유대인의 전통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은 분명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의 중심에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르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촉망받던 유대 청년지도자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유대 지도자로서 자신도 무슨일이든 해야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바울이 성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을 통해서입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사도행전 7:58-59)
사울(큰 자), 사도 바울(작은 자)의 본명이지요.
믿음의 사람, 최초의 초대교회 순교자 스데반의 마지막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재판에 증인 역할을 했고 스데반의 처형을 마땅한 일로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7:58; 8:1, 3).
지금의 기독교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 신약성서의 절반에 해당하는 성서의 저자라기에는 성서 안에서 그의 첫 등장이 참으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8장 3절에 보면 그는 성도들의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등 교회를 ‘잔멸하였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잔멸하다’는 뜻의 헬라어 ‘엘류마이네토’는 멧돼지가 포도원을 파헤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시 80:13) 당시 바울의 난폭함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그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 12명을 중심으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핍박에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말씀 로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을 전하였지만 16세기 종교개혁과 18세기 감리교회의 탄생은 이 로마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도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2020년에도 바울에 관한 책이 여전히 출판되고 있습니다. '바울, 그는 누구인가?' 바울이 누구인지 우리는 앞으로도 정확하게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메섹 성도들을 체포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다메섹에 가던 도중 밝은 대낮, 정오에 너무도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에게 비추니 사울은 땅에 엎드러집니다. 그 빛이 사람에게 비추니 엎드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1-9)
다메섹에서 드디어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과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
우리는 지금, 사울의 모습일까요? 바울의 모습일까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만나기 전일까요? 만나기 후일까요?
로마서의 말씀은 예수님을 만난 후,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시길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간절히 그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즉 그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다.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말아라.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 나셨으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우리도 그와 함께 살아날 것이다.
그는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를 꺽으셨다.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계신다.
그러니 너희도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라.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 말씀은 다시 5개의 동사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죽었다. 의롭다. 살아계신다. 살아가라. 드리라.
이 5개의 동사로 통해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옛사람은 죽었다. 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그가 우리를 위해 단번에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계신다.
그러니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라.
너희 자신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에 대하여 죽고 옛사람은 죽었다."
이 말씀은 사울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씀이겠지요.
스데반의 순교의 자리, 사울에겐 죄의 그 자리,
그 자리에 있던 옛 사람 사울은 죽고 다메섹에서 그 빛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듣고 이제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 빛을 본 사람, 그 빛을 보고 땅에 엎드려 굴복한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옛사람, 죄에 빠진 옛사람은 죽고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그 과정이 또 다른 의미의 옛사람이 죽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본래, 나만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이듯이 우리의 삶도 하나가 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이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얼마 전 목사님들과 모임을 가졌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선교사님들이 프랑스에서 모임을 갖게 되어 서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한국에서 몇 대에 걸쳐 믿음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3대, 어떤 분은 5대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 시리아에서 오신 시리아 선교사님이 말씀하시길 자신의 집안은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집안의 모든 첫째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고 하셨답니다.
2000년 동안을 하나님께 모든 집안의 첫째를 드리는 그 믿음,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울을 바울되게 하시고 2000년 동안 변함없이 역사하신 그 성령이
오늘 우리와도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영광과 능력이 세세 무궁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