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찬양 _ 찬송가 8장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128번 사순절(5)
(인도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회중)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인도자)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회중)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인도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회중)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인도자)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회중)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1-8)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봉헌 _ 마음을 다하여
말씀 _ 시편 73편 15~17절
오늘 시편 73편 본문 말씀을 브루그만은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이야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편 73편 말씀을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른 미드라쉬로 설명을 하고 있으시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미드라쉬[Midrash]는 '찾다, 조사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드라쉬'에서 유래한 말로, 성경해석방법 및 그 내용을 말합니다. 미드라쉬의 목적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혀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간파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율법과 원리를 이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브루그만은 미드라쉬를 성서의 구절들을 개개인의 성황에 적용시켜 해석하려는 유대교의 성서주석 방법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미드라쉬 전통에 따라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시편 73편의 말씀을 상황에 맞게 적용하여 말씀을 전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이야기의 원형이 시편73편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시편73편은 아삽의 노래(시)입니다.
아삽[Asaph]은 ‘모으는 자’란 뜻으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찬양하는 사람이며 합창단의 악장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언약궤 앞에서 제금(현악기)을 켜는 자로서 시편을 열두 편이나 지었습니다. 시편 50편, 73~83편까지가 그의 시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를 ‘선견자’라 호칭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성전에서 찬송을 부르는 직무를 맡았으며 특히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그의 자손들은 예루살렘 성전 기공식 때 찬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스 2:41; 3:10; 느 7:44).
아삽의 시, 시편 73편은 절망에 빠져 절규하는 한 사람의 목소리에서 자신의 비참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고뇌하는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의 울음소리로, 다시 질투와 부러움으로 괴로워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프지 않고, 그 몸이 건강하고 살찌며,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생이나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교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옷이다.”(시73:1~2)
“보라, 그들은 모두 악인들인데도 항상 평안하고 재산도 더 불어나고 있다.”(시73:12)
“그렇다면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내가 손을 씻어 죄 없이 한 것이 다 헛일이라는 것인가? 나는 온종일 고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 (시73:13~14)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교만하고 폭력으로 힘을 과시하지만 그들은 건강하고 고생이 재앙도 없이 항상 평안하고 재산은 날마다 불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73편을 노래하는 시인이 곧 “나”입니다. 나는 마음이 깨끗하고 죄 없이 살아왔으나 온종일 고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삽의 시를 브루그만은 우리 안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토해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욕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모두들 건강하고 고통이나 재앙이 없기를, 항상 평안하고 날마다 재산이 불어나길 바라며 살아갑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깜짝 놀라게 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보니 반 친구들 중에 몇 명이 100만원이 넘는 티셔츠나 운동화를 신고 다니고 교복바지 벨트도 비싼명품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머나, 부럽네,,, 부럽진 않니?” 제가 놀라 건넨 말에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부러운건 아닌데,,, 그냥 보여요...” “돈이 많아서 하고 다닌다는데 자유지요. 뭐.”
거기서 청소년들은 비싼 명품을 하고 학교에 다니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에 진짜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가 있어요. 예고를 갈 실력인 것 같은데 진짜 공부는 안해서 우리학교에 왔데요. 그 친구 아빠가 사업을 하시는데 진짜진짜 부자라... 걘 진짜 공부는 안하더라고요. 그림만 그려요. 걔 말이 아직 하고싶은 걸 못 찾아서 그냥 그림만 그린데요...”
이 이야기에는 정말 부럽지 않니?하고 묻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힘든 것이 공부인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고 싶은데... 어른들은 그렇게 살면 나중에 가난해진다며 하기 싫은 공부를 강요하곤 하는데... 정말정말 부자에 좋은 아빠 덕분에 공부 같은 건 안 해도 되고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면서 하고 싶은거 생기면 그 때 공부한다는 친구가 부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아삽의 시처럼 그들은 정말 아프지 않고, 그 몸이 건강하고 살찌며,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생이나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항상 평안하고 재산도 더 불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의 절반을 요구합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재산을 주십시오.”
아버지는 농장의 주인입니다. 둘째 아들은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농장을 팔아 돈을 갖고 더 넓은 세상에서 신나게 살아보는거야, 그래,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는거지. 충분한 재산이 있고, 또 넓은 세상에 나가면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을거야...’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둘째 아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나눠 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시나리오는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써버렸을 때 그 지방에 흉년이 들어 그는 궁핍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비로서 그는 제 정신이 들어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빵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그래서 우리는 둘째 아들을 ‘탕자’(prodigal son)라고 부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나중’ 모습에는 시편73편에 없는 감추어진 반전의 이야기가 있다고 브루그만은 말합니다.
아버지의 집, 하나님의 성소로 돌아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스스로 돌이키고서야’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들은 ‘스스로’돌이킨 것은 아니고 그저 그의 참된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어 그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로 돌아왔으며 그가 함께 있고 싶은 유일한 분이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나서야 돌이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둘째아들은 그의 형이 자신의 몫으로 농장을 소유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몫이고 그가 원하는 유일한 것이 되었음을 브루그만은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아들이 원하는 것은 이제, 아버지의 곁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가 원하는 유일한 것이 되었습니다.
시편73편에는 나중에 돌아오는 반전의 아들의 이야기는 없지만 그와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시편 73편 19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순식간에 황폐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두려움에 완전히 휩싸여 버렸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언젠가는, 순식간에 황폐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영원히 두려움에서 벗어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두려움은 숨길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숨기려하면 더욱더 깊숙이 더 크고 더 두렵게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끝은 언제나 ‘죽음’에 맞닿아 있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시편 73편 21~24절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내 마음이 쓰리고 내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팠지만, 나는 어리석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한낱 주님 앞에서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뜻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나를 영광스럽게 맞아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한분이십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 놀라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시편 73편의 시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겠습니까? 땅에서도 내가 바라는 것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다 쇠약해졌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힘이요. 내 영원한 몫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물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항상 평안하고 재산이 더 불어나는 그들이 부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는지, 또한 알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실패했고 그는 나중에 스스로 돌이키고서야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탕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또한 우리는 “스스로 돌이킬 수도” 있습니다.
“부러운건 아닌데,,, 그냥 보여요...” “돈이 많아서 하고 다닌다는데 자유지요. 뭐.”라고 말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논리적으로 부러워할 필요 없다고 설명할 순 없어도 우리의 진실된 믿음 안에서 우리가 물질문명의 유혹으로부터 결연하고 주님의 품 안에서 참된 관계의 기쁨과 평안과 자유와 만족함으로 참 소망과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스스로 돌이키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거룩한 계절입니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시고 달려와 우리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실 것입니다.
“그러고나서 그는 일어나서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눅15:20)
찬양 _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