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1장 다 찬양하여라
신앙고백 _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129번 종려주일
(인도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회중)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인도자)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회중)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인도자)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회중)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인도자)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회중)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9-10)
(인도자)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회중)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다같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송영 _ 찬송가 5장 이 천지간 만물들아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141장 호산나 호산나
말씀 _ 마태복음 21장 1~17절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40일간의 사순절(四旬節 Lent 2.22 ~4.8) 여섯 번째 주일로 내일부터 고난주간(苦難週間 Passion Week 3.30-4.4)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다음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우리는 지난 2월 18일을 시작으로 사순절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4일이 흘렀고 이제 가장 성스러운 6일의 사순절, 고난주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살아간다면 매일이 거룩한 날일 것입니다. 모든 순간은 가능성과 희망이 가득한 순간이며, 모든 관계에서 성령의 활동하심에 대한 통찰이 가능합니다. 모든 대화는 은혜와 평화의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존 웨슬리는 “모든 일 중에 최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계신지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 있으며,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바른 반응은 은혜에 대한 경외감으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8일간이 바로 그런 때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8일이 역사와, 우리의 역사와,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과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모두 바뀐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주장합니다. 종려주일부터 부활절에 이르는 동안 세상은 다시 만들어져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우리는 그것의 일부가 되는 복을 받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선물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1장 1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면 곧 매여 있는 나귀와 그 곁에 있는 새끼 나귀를 보게될 것이다. 그것들을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십니다.’하고 말하라. 그러면 그는 즉시 그것들을 보내 줄 것이다.”
종려주일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너무도 신기한 것은 어떻게 이날, 그 예루살렘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모였냐?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의 절기 유월절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각지에서 유월절을 지키기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득합니다.
이 모여든 사람들이 보여준 행동을 우리는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 위에 자신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고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가시는 길입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길 위에 말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사람들은 길가의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앞으로 또 뒤로 무리들이 따라가며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이 있으시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놀라운 광경입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상상도 못해 본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나귀를 끌고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다음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리둥절?이라는 표현이 적확할까요? 사람들이 왜들 이러는지? 무척이나 당황했을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아무도 오늘의 종려주일, 그러니까 우리가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을 기획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호산나’를 외치는 소리가 예루살렘을 들끓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더욱 묻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다윗 때부터 이어진 단어이지요. 본래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시118:25)라는 짧은 기도문이며, 때로 찬양의 외침으로도 쓰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초막절에 제단 주위를 돌면서 환호성과 함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길가에 섰던 군중이 외쳤습니다. ‘호산나’ 그들은 메시야의 구원을 간구하는 동시에 그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격하는 의미를 담아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마21:9-15; 막11:8,10; 요12:13).
어떻게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누구로부터 일어나게 된 일일까요?
아무도 시키는 이가 없습니다. 그 누구로부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힘이 예루살렘을 감쌌습니다. 이것이 칼 바르트의 개신교신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권능>의 이해에 맞닿아 있을 것입니다. 권능에 의해...
그 권능은 임마누엘 역사의 발생 안에서, 예언자와 사도들 안에서, 공동체의 모음, 건립, 파송 안에서 주권적으로 일했고 또 지금도 일하고 있다. 그 권능은 그렇게도 주권적인 권능이며, 모든 것을 서술하고 설명하는 신학적 명제들 안에 은폐되어 있는 권능,
그 권능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요3:8) 알지 못한다. 그는 그 권능의 사역을 다만 뒤따를 수 있을 뿐이며, 앞서지는 못한다.
“이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의 물음에 또 다른 사람들이 대답합니다. “이 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님이시다.”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나귀 새끼니라.”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나아가시고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어제와 같은 성전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건이 주후 33년 3월 29일의 일입니다. 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구원받았을까요? 구원을 간구하는 목소리에서 분명 구원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완성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절기로 기념하는 시간이 오늘부터 8일입니다.
마태복음 21장 16절 말씀입니다. ‘호산나’를 외치는 아이들이 불쾌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린 아기들과 젖먹이의 입으로 찬양하도록 준비하셨다.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찬양 받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은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이것이 미리 계획된 일이었습니까? 혹은 왠지 신비롭게 일어난 것이었습니까? 혹은 제자들이 나귀를 훔친 것이었습니까? 마태가 말한 것처럼 군중이 정말 많았다면 퍼레이드가 끝나는 곳에서 “이는 누구냐?”고 예수의 정체에 대해 질문한 “온 성”은 누구였습니까?
온 성은 “이는 누구냐?”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아마도 성과 무리가 나란히 행진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무리는 많았고,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과 도시 거주민들로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사건을 이해했고, 많은 사람들이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호산나는 한 때 간청의 기도를 뜻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만세” 또는 심지어 “안녕”이란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굿바이/안녕”라는 작별인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본래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이란 축복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신호, 암호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왜 이것을 다시 하는 것이지?”라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그 대답은 어깨는 으쓱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 대답은 “이 사람은 갈릴리에서 온 예수라는 사람이야”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래, 맞아”라고 말하면서 갈릴리 출신의 예수가 세상에서 어떤 분이었는지를 아는 체 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이해한 이들과 이해하지 못한 이들, 모두 함께 '호산나'를 외쳤던 이들이 다시 금요일에 몰려듭니다. 목이 터져라 외쳤던 찬양의 외침은 더욱 거센 목소리로 고통스런 죽음을 요구하는 잔인한 외침으로 바뀌었습니다.
“호산나”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가 같은 공간에서 충돌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여기서 우리는 칼바르트의 개신교신학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우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불순종하는 자의 자리에서 종으로서 사셨고 고난당하셨고 죽으셨으며, 인간들의 모독 행위를 폭로하셨지만 그러나 또한 덮으셨으며, 그들의 죄를 짊어짐으로써 제거하셨으며, 인간들을 신적 파트너와의 결합으로 인도하시고 그분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종려주일, 그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위해 가장 중요한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입니다. 이 퍼레이드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몇 년이 지나서 몇 년 후 일지도 모릅니다만 마태는 그 사건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우리가 요지를 파악하는 것을 돕기 위해 스가랴의 말을 생각해 냅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오신다. 그는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멍에 메는 짐승의 망아지, 곧 새끼를 타고 오신다.” (스가랴 9:9)
우리가 가장 간절히 구해야 하는 한가지,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의 마지막 거룩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찬양 _ 찬송가 135장 어저께나 오늘이나
주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