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80번 고린도후서 4장
(인도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회중)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인도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회중)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인도자)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회중)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인도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회중)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인도자)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회중)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7-11)
송영 _ 찬송가 4장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182장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말씀 _ 마태복음 10장 40~42절
크로노스의 인생을 카이로스의 예배로
여러분은 지금 시간을 어떻게 지나보내고 계십니까? 지난 금요일, 청년들과 함께 월간 북클럽을 하면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일반적인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라고 부르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때를 맞이하는 특별한 순간, 곧 하나님의 카이로스적 순간을 맞이할 때는 '카이로스(Kairos)'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카이로스의 때는 모든 저녁이 저물어갈 바로 그때입니다. 우리가 같이 불렀던 찬양인 "날이 저물어 갈 때"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이 찬양에서 말하는 '날이 저물어 갈 때'는 단순히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카이로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뀔 때, 우리의 삶이 전체적으로 순환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훅 들어오셨을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이 한 시간의 예배가 여러분에게 카이로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존재적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 카이로스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이 삶을 바꾸고, 꿈을 꾸고, 이상을 가지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의식적으로 마지못해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혼을 담아 찬양을 드리고, 이 주일 한 날은 결코 크로노스 안에 포함되어 있는 형식적인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전 존재가 바뀌는 시간,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시간으로서의 카이로스, 그 시간이 바로 오늘의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 제가 준비한 원고대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다양한 형태로 설교를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계속해서 고백해 왔듯이, 우리의 영적인 성장, 즉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믿음 안에서 성장할 것인가가 2026년 올해 저의 가장 큰 고민이자 핵심 주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자들을 보내시며 주신 약속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 9장 35절부터 10장 8절, 그리고 지난주의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세상으로 파송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난주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길고 긴 당부의 끝자락, 단락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0장 40절에서 42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 제자들이 파송된 곳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이라는 이 시작을 들으면, 얼핏 제자들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치고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이 메시지는 제자들보다는, 제자들이 앞으로 가게 될 공동체나 그곳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끝까지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문장의 시작은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으로 출발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결론에 도달합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소중한 당부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점을 너희가 먼저 기억하고, 그들을 대할 때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사람들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엄청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지난주의 말씀을 기억해 보면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제자와 선생이 같을 수 없으나, 너희가 나를 믿음으로 너희와 내가 같아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 너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비록 너희는 제자일지라도 선생과 같은 은혜를 주셨으니 너희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가 간다는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0장 1절을 통해서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가 이루어집니다. 그 초대를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되며, 치유와 고침과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는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일의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며, 또한 우리를 통해 초대받은 이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모든 사역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게 하는 것에 있다는 뜻입니다.
영접의 본질, 환대와 행동
여러분은 이 예배를 통해서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영접'이라는 단어는 사실 외교적인 언어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잘 알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영접을 다른 말로는 '영전'이라고도 합니다. 관청에서 큰 행사를 할 때 가장 귀한 분이 오시면 치르는 의전 행사가 바로 영접이자 영전입니다. 즉, 최고의 예우로 환영한다는 의미와 함께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 '영접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대초마이(Dechomai)'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10장 14절에서도 이미 등장한 바 있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그 '영접'입니다. 영어로는 'Receive', 즉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표현됩니다.
대초마이든 리시브든 영접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우리에게 조금 어렵게 다가옵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신학자들은 아주 쉬운 일상의 단어로 표현해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환대'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가 지난 한 달 동안 YWCA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의 근원을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YWCA의 정신이 무엇인가? 바로 환대와 연대인데, 어떻게 우리 안에서 그 정신이 깨어질 수 있느냐" 하며 지난 5월과 6월 한 달간 깊이 고뇌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을 영접한다는 것은 곧 환대를 베푼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환대란 무엇입니까? 환대란 낯선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호스트(주인)의 보호 아래 머물다가, 그 후에 친구나 혹은 적으로서 그 보호 속에서 떠나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결국 환대한다는 것은 단지 친절하게 대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보호자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며, 적으로부터 지켜주는 모든 적극적인 보호 행위를 뜻합니다. 외교적인 용어로 바꾸어 보면 저는 이것이 '동맹'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환대와 연대가 결국 같은 의미라고 믿습니다. 진정으로 환대하는 자가 비로소 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한 환대의 의미는 바로 그러합니다.
또한 환대라는 단어는 이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지 일시적으로 친절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이자 성품이며 행동의 방식 그 자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서로 옆에 있는 분들을 향해 한번 환하게 웃어 보시겠습니까? 그 웃음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닌지 우리는 대번에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한 번 웃어보십시오. 조금 어색하십니까? '아, 이건 진짜 웃음이 아니네' 하고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이 없는 태도를 볼 때 항상 "영혼이 없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엄마, 내가 엄마를 백 번 부르면 백 번 다 친절하게 대답해 주면 안 되겠어?" 하고 말입니다. 바쁘고 지칠 때 "왜? 왜? 왜?" 하고 무미건조하게 답하면 아이는 금방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환대라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친절한 척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환대란 그 사람의 정체성과 성품, 그리고 그 정체성과 성품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행동의 모든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환대는 결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환대는 곧 '행동'입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나 부드러운 눈빛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직접 몸으로 움직이는 행동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무엇이겠습니까? 몸으로 직접 다가가는 것입니다. 누군가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버선발로 먼저 뛰어 나가는 태도입니다. 성경을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바로 뛰어나가 그분을 맞이합니다.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 항상 예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인사합니다. 엎드려 경배하는 그 태도는 몸으로 하는 고백입니다. 마르다 역시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많은 것을 몸으로 봉사합니다. 입으로만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행동의 모든 방식, 즉 정체성과 성품과 행동의 방식이 결합한 것이 진정한 환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18장 5절을 보면, 마태는 마가나 누가보다 이 '영접'과 '환대'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는 말씀 역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깊은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처럼 두 가지 핵심적인 의미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모든 행위의 본질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일주일의 삶 가운데 구별된 이 한 시간만큼은 나의 삶에 하나님을 온전히 영접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 은혜의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가장 귀한 분이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소중한 시간이 바로 이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것에 대한 명확한 이해입니다.
디다케, 환대를 위한 생명의 길
이제 두 번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서 42절에 있는 말씀을 천천히 함께 소리 내어 읽겠습니다. 시작.
(성도들과 함께 낭독)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결국 40절부터 42절까지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선지자이자, 선교사이자, 제자들입니다. 이 파송된 제자들을 기쁘게 영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성경은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40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 전체가 너희를 영접하는 자에 대한 축복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부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제자들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영접해야 하는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교역자들과, 이 땅에서 여전히 주님의 심장을 품고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영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외면하고 싶을지라도, 이 제자들을 대접하는 문제는 우리 신앙에서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 번째 주제였던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명제는 우리가 관념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래, 마땅히 하나님을 영접해야지" 하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우리가 실질적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영접한다고 고백하지만, 그 영접의 실제적인 모형과 통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너희를 영접하는 자", 곧 주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입니다. 이 땅에서 수고하는 모든 교역자와 선교사,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제자들을 어떻게 영접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신앙적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누군가 신앙의 편지를 보내오면, 그 편지를 전달하러 온 사람을 정성껏 영접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자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고린도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에는 국가가 운영하는 우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바울이 직접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 편지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편지를 가지고 온 전달자를 맞이하는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그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 중 이그나티우스(Ignatius)라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러한 가르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집 관리인이 개인적인 용무로 사람을 보냈다면, 그 사람을 보낸 집 관리인 본인인 것처럼 귀하게 영접해야만 합니다."
이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바울이 전한 편지를 들고 누군가 찾아왔다면, 그를 만난 사람은 그를 단순한 심부름꾼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보낸 바울 본인을 만난 것처럼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적어도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다 상식처럼 이해하고 따르던 아름다운 환대의 문화였습니다. 과연 이러한 환대의 분위기가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도 온전히 남아 있을까요? 지금은 안타깝게도 많이 사라진 것 같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에게는 우리가 아는 신약 성경 외에도, 신앙의 교과서처럼 읽히던 또 하나의 중요한 문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헬라어 신앙 용어 네 가지 중에서 하나를 잘 선택해 보십시오. 당황하지 마시고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케리그마(Kerygma)', 두 번째는 '디다케(Didache)', 세 번째는 '디아코니아(Diakonia)', 네 번째는 '코이노니아(Koinonia)'입니다. 이 중에서 초대교회의 숨겨진 교과서이자 성경의 외경으로 분류되는 책의 이름이 무엇일까요? 찍어 보셔도 좋습니다. 정답은 4번이 아니라 2번, 바로 '디다케'입니다.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이 문헌의 정식 명칭은 "열두 사도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주님의 교훈", 줄여서 '디다케'라고 부릅니다. 이 문서는 대략 주후 100년에서 150년 경, 즉 초대교회 시기에 교회의 규율이자 규칙, 그리고 지도자들의 지침서로서 핵심적인 성격을 띠고 사용되었던 자료이며, 놀랍게도 1875년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속해서 전수되어 온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디다케는 총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구조가 아주 명확합니다. 1장부터 6장까지는 '생명의 길'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이어서 7장부터 10장까지는 그와 대비되는 '사망의 길'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뚜렷하게 나눈 뒤, 이어서 성례전과 제례, 예언과 복음서의 지침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금 들었던 이 네 가지 단어, 케리그마, 디다케,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는 각각 무엇을 의미할까요?
- 케리그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포'를 뜻합니다. 이 케리그마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단순한 대중 연설(스피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권위 있는 케리그마, 즉 선포입니다.
- 두 번째 디다케는 영적인 '교육'을 의미합니다.
- 세 번째 디아코니아는 이웃을 향한 '봉사'와 섬김을 뜻하며,
- 네 번째 코이노니아는 성도 간의 아름다운 '교제'와 나눔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를 지탱하던 가장 중요한 네 가지 기둥이 바로 이 케리그마, 디다케,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였습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요소가 살아 숨 쉬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 곧 '에클레시아(Ecclesia)' 공동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의미에서 교육을 뜻하는 '디다케'가, 앞서 우리가 강조했던 '환대'나 '누군가를 영접하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생각했던 교육의 최종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를 어떻게 영접하고 대접할 것인가"를 배우는 과정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육의 지향점이 환대에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위대한 대전제 안에서, 환대와 영접은 디다케라는 교육을 성취하기 위한 핵심 도구인 것입니다. 환대라는 것은 아무런 훈련 없이 그냥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환대하고 영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인 '교육'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교회 교육의 참된 목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세상적인 성공이나 대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모든 디다케, 즉 교육의 최종 목적은 바로 '환대'에 있어야 합니다. 그 환대라는 단어를 마음 깊이 새기고, 정말로 한 사람을 온전히 품고 환대하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교육을 받는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 디다케 문서에 너무나 중요하고 가슴을 울리는 문장이 있어서, 그 내용을 번역된 원문 그대로 여러분께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디다케 지침서의 시작과 끝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으니, 곧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길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생명의 길은 가장 큰 계명을 토대로 한다. 생명의 길은 첫째, 너를 지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네가 남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너도 남에게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바로 참된 교육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생명의 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생명의 길에는 다른 모든 덕목 중에서도 타인을 향한 관대함, 그리고 환대의 의무를 다하는 것과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지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교육의 알맹이입니다. 반면에 '사망의 길'은 다음과 같이 온갖 악한 행실로 그 특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망의 길이 있으니, 선한 것들을 핍박하는 것이 악한 것이요, 거짓을 사랑하며 의의 상급을 알지 못하며, 선과 의로운 판단을 분별하지 않으며 선이 아니라 늘 악만을 바라보는 길이다. 온유와 인내가 멀리 떨어져 있으며, 헛된 것을 사랑하고 오직 눈앞의 보상만을 쫓는 사람들의 길이다. 궁핍한 자를 보고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공경에 처한 자를 위해 함께 수고하지 아니하며,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행태다. 또한 어린이를 살해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며, 공경에 처한 자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더욱 가혹하게 억압하며, 가난한 자를 불의하게 재판하고 모든 일에 그릇된 잘못을 행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사망에 이르는 길, 즉 파멸에 이르는 길은 본질적으로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영적으로 게으른 모습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참된 제자의 분별과 약속된 상급
오늘 우리는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눈에 보이는 주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연장선 위에서 '환대'가 가지는 참된 신앙적 의미와, 환대를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초대교회 문헌 디다케의 가르침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찾아오는 선지자나 교사, 혹은 사도들을 무조건 맹신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참된 제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명확한 열쇠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서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환대는 당연히 생명의 길에 속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망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는 거짓된 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선포하십니까?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선지자의 상이 있고, 의인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의인의 상이 있다고 하십니다. 나아가 지극히 보잘것없는 어린아이 한 사람에게라도 제자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이 있을 것이라는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디다케의 교육적 의미에서도 영적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서의 지침에 따라서 그들을 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참된 사람으로 영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만약 스스로 제자라고 지칭하고 자청하는 자들 중에, 실제로는 제자가 아닌 거짓된 자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디다케는 분명하게 언급하며 경고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스스로 바울의 제자라고 말하며 바울의 편지를 들고 교회를 찾아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앞서 배운 대로 교회의 규칙(디다케)에 따라 편지를 들고 온 사도를 온 마음으로 환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첫 번째, 두 번째 원칙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분별의 기준이 뒤이어 등장합니다. 만약 찾아온 자가 스스로 거짓된 모습을 증명한다면, 그를 단호히 떠나보내고 대접하지 말라는 지침입니다.
이 가르침이 이해가 되십니까? 너희에게 오는 모든 사도와 전령들을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쁘게 영접하되, '그러나' 이 한 마디 조건이 붙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언어로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 참된 선지자라고 볼 수 없다. 오직 그의 삶 속에서 주님의 도리와 방식들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정한 선지자이다. 그러므로 행함이 드러나는 그들의 생활 방식을 보고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능히 구별할 수 있다. 아무리 입으로 진리를 유창하게 가르칠지라도,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선지자는 결단코 거짓 선지자이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깨달으셨습니까? 오늘 본문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이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말씀의 본질은 제자인 우리 자신이 먼저 타인을 온전히 '영접하는 사람', 즉 환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은 겉으로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받을 환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다시 해석하면 제자 된 우리가 먼저 세상과 이웃을 향해 환대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디다케가 말하는 교육의 본질을 깨닫고 환대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자이기 때문에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환대를 베푸는 사람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라는 신분 특권으로 영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영접하는 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비로소 영접을 받는 존재가 바로 주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대통령도 아니고, 대단한 시장도 아니며, 외교부 장관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화려한 직업이나 높은 신분으로 영접을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가 먼저 낮아져서 이웃을 영접하고, 우리가 먼저 소외된 자들을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 거룩한 삶의 방식을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환대를 받고 영접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이 시대에는 참으로 수많은 말과 화려한 언변들이 난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비록 진리를 가르치는 그대로 100% 완벽하게 행하며 살 수는 없을지라도, 진리를 아는 자로서 그 진리를 행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우리의 모든 행동 방식을 바꾸어 내고, 크로노스의 삶을 카이로스의 삶으로 전환하여 날마다 삶으로 예배를 살아내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 내게 보내주신 이웃들을 온전히 영접하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예배 시간을 통해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해 들이는 믿음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영접을 받으려고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먼저 기꺼이 영접하는 자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복음서에서 약속해 주신 그 거룩한 상급을 이 땅에서도 풍성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늘 나라에 쌓이는 그 영원한 상급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기쁨과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복된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주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